지난해 라스베가스오픈 우승 이후
‘반짝 우승 선수’ 부담 느껴
서서아(22, 전남연맹)와 연락한 건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세계여자10볼선수권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다음 날인 지난 19일. 꿈에 그리던 세계 챔피언 등극을 아쉽게 놓치며 준우승한 그는 장거리 비행 속에 정신과 육체 모두 지쳐있을 법했다.
천근만근 몸을 끌고 내심 부모님이 계신 광주로 내려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텐데 일본 아마가사키시에서 진행 중인 제57회 전일본선수권대회 참가로 다시 훈련장에 나와야 했다.
세계선수권 준우승 시간 갈수록 아쉬움 커
서서아는 “가족이 보고 싶은데 일본 대회 참가로 통화만 했다. 준우승하고 부모님께서 꽃다발을 보내주셨다. ‘2등도 잘했다’ ‘자책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시더라”고 말했다.
한국 여자 포켓볼은 2000년대 김가영 차유람의 존재로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이후 3쿠션이 대세로 자리매김하면서 포켓 스타 다수가 3쿠션 큐를 잡았다. 김가영은 현재 프로당구 LPBA ‘1강’으로 활약 중이다.
다만 포켓은 당구의 기초로 불린다. 당구가 여러 면에서 기초 체력을 튼튼하게 하려면 포켓도 활성화하고 유망주를 배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서서아의 존재는 커다란 활력소가 되고 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제2 김가영’으로 불렸다. 아시아선수권 여자주니어복식 3연패(2016~2018)와 세계주니어선수권 준우승(2018) 등 두각을 보였다. 조선대사대부여고를 다니다가 2018년 자퇴한 뒤 ‘롤모델’ 김가영을 찾아가 직접 당구를 배운 건 유명한 일화다.
시니어 무대에서 주목받게 된 계기는 지난해 1월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서 열린 세계여자9볼선수권이다. 서서아는 2012년 김가영이 10볼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이후 한국 선수로는 11년 만에 4강에 올랐다.
‘제2 성장통’ 이겨내고 또다른 비상 꿈꿔
그리고 이어진 미국 라스베이거스오픈에서 시니어 데뷔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꾸준히 주요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새로운 ‘포켓 퀸’의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서서아는 이 기간이 성장통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번 10볼 세계선수권 준우승 이후 소셜미디어에 ‘2023 라스베이거스 이후 꽤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반짝 우승 이후 사라지는 선수가 되지 않을까, 실력이 부족한데 너무 갑자기 한 우승이 아닐까 하는 잡생각이 큰 부담으로 찾아왔다’고 글을 남겼다.
서서아는 이 얘기를 꺼내자 “말 그대로 한 번 반짝 우승한 선수가 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 라스베이거스 대회 우승 이후 여러 번 입상했지만 경기력이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훈련량이나 노력은 더 했다고 생각하는데 성적(우승)이 마음대로 안 나왔다”며 “내가 (라스베이거스 때) 그저 운이 좋았나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그는 “근래 들어 이런 마음때문에 성적이 더 안 나왔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10볼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스스로 마음을 내려놔도 될 것 같다고 여겼다. ‘내가 너무 조급했구나’ ‘편하게 하자’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당구는 대표적인 ‘멘탈 종목’ 중 하나다. 스스로 알을 깬 서서아는 한 차원 더 진화했다. 10볼 세계선수권에서 사상 첫 결승 진출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김가영 이후 12년 만에 세계 챔피언 탄생에 기대가 쏠렸다.
결과는 ‘통한의 역전패’였다. 크리스티나 트카흐(러시아)와 결승에서 1세트를 4-1로 이긴 그는 2세트에도 3-2로 앞서며 승리가 유력했으나 10볼을 실수하며 3-4 역전패했다. 이후 3세트를 잡았지만 4세트에 다시 수비 실수가 나오면서 트카흐에게 패했다. 결국 5세트에도 0-4로 져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서서아는 “4시간30분 넘게 결승전을 했다. 평소와 같은 마음 가짐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큰 실수가 나와 나 역시 놀랐다. 나도 모르게 집중력이 흐트러졌다”며 당시 상황을 돌아봤다. 또 “지난 2년간 외국 대회를 많이 다녔지만 결승 경험 등이 부족한 게 드러났다. 오히려 이번 경험을 통해 더 좋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소중한 경험치를 쌓았지만 챔피언 등극을 코 앞에서 놓친 아쉬움은 숨기기 어렵다. 서서아는 “결승전이 끝났을 땐 후련했다. ‘아 이번엔 내가 우승할 게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덤덤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안 괜찮더라”고 웃었다. 그는 “10분, 30분, 하루가 지날수록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아픔을 뒤로 하고 다시 기지개를 켠다. 스스로 시니어 무대에 연착륙한 비결로 꼽는 건 ‘공부하는 당구’다. 1년 전 서서아는 “당구는 똑같이 치면 머무르게 된다”면서 “공은 계속 배워야 하고 기본기, 기술을 넘어 공의 원리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세계선수권 결승 무대를 밟고 난 뒤에도 같은 생각이다. 지속해서 ‘배움의 가치’를 실천하며 더 높이 날겠다는 의지다.
서서아는 “내가 국내 선수 중 국제 무대 경험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큰 대회에서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라며 “포켓은 장시간 경기하는 데 힘을 쓸 때와 쓰지 않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 누군가가 ‘너는 4시간 내내 힘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 중요한 상황에서 실수가 나올 수 있다더라. 이번 대회에서도 증명된 것 같다. 더 연구하고 발전하겠다”고 말했다.
‘제2 성장통’을 이겨낸 서서아의 당구는 어떤 식으로 거듭날 것인가. 그의 겸손한 도전 정신이 더 기대를 품게 한다. [김용일 칼럼니스트/스포츠서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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