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 끝난 왕중왕전(SK렌터카배월드챔피언쉽) 4강전에서 김가영과 차유람은 3시간20분간의 격전 끝에 김가영이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김가영은 기세를 이어가며 결승전에서도 스롱피아비를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김가영-차유람 4강전을 보면서 두 선수의 지난 수년간 포켓볼 경기에서의 맞대결이 떠올랐다. 참 길고도 질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선수 소재로 영화나 드라마가 나와도 손색없을 정도로 한국 당구사의 한 페이지씩을 장식할 선수들이다.
필자가 김가영 선수를 처음 본 것은 90년대 중반이다. 당시는 중학교 3학년이던 어린 학생이 4구를 400~500점 정도 친다며, 아버지와 함께 성인 남자 포켓볼 선수들과 경기하러 다닐 때였다. 그때는 포켓볼 인기가 워낙 높았고, 자넷리라는 세계적 스타도 있던 터라 ‘중학생 김가영’이 자연스럽게 포켓볼 선수로 입문하지 않았나 싶다.
포켓볼 선수 입문한지 채 1년도 되지 않던 김가영이 쟁쟁한 선수를 물리치고 대회(그때는 학생부가 따로 없었다)에서 우승하던 기억이 새롭다. 캐롬에서 익힌 기술을 포켓볼에 고스란히 녹여 ‘포켓팅’만 익히면 단시간에 포켓경기에서도 통한다는걸 보여준 셈이다.
대개 포켓경기는 단순히 두께만 잘 맞춰 공만 넣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 단순하지 않다. 특히 9볼 경기처럼 순서대로 쳐야 하는 포켓볼 경기에서는 다음에 쳐야할 순번 공을 치기 좋게 포지션 해야 하고, 넣기 어려울 때는 상대가 치기 어렵도록 수비도 해야 한다. 상대 수비가 뛰어나 쳐야 할 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쿠션을 이용한 ‘뱅크샷’이나 ‘점프샷’ ‘커브샷’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
최근에는 반대로 포켓경기에서 이런 기술을 익힌 다음 캐롬으로 전향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차유람 김진아 선수를 꼽을 수 있다.
다시 90년대로 돌아가면, 김가영 선수는 어린 나이에 국내대회를 석권한 후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 위해 90년대 말 (당시19세) 대만 포켓 유학길에 오른다. 아시아에서는 필리핀과 대만이 ‘포켓볼 강국’이라서 박신영 정영화 등 남자 선수들이 대만에서 선진 포켓 기술을 배워오던 시기다. 아울러 우리와 생활 환경도 잘 맞았기 때문에 대만 유학을 선택했을 것이다. 후에 WPBA(세계여자프로) 투어에 진출하고도 상당기간 대만에 머무르며 활동했으니 말이다.

아버지 얘기는 처음에는 테니스를 가르쳤는데 땡볕에서 덥고 추운 날 힘든걸 보는게 안쓰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우아한 운동이 없을까 알아보던중 우연히 김가영 선수 기사를 보고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초등학생 아이가 훗날 김가영 선수의 라이벌로 성장한 차유람 선수였으니…, 한편의 영화같은 인연의 시작이다. 두 선수 나이 차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은걸 감안하면 김가영 선수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국내 정상이 됐는지 알 수 있다.
필자가 차유람 차보람(언니) 자매와 한국아카데미에서 같이 지낸지 얼마 안된 다음해 2001년 봄 (차유람)아버지께서 학교 당구부 창단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자매가 진학한 서울 동도중고교에 우리나라 최초 학교 당구부가 창단됐고, 필자가 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매가 학교를 그만두면서 당구부가 해체됐다. 어쨌든 ‘당구사관학교’로 불리는 매탄고가 생기기 5~6년 전 일이니 꽤 앞서나간 편이다. 당시만 해도 당구계에선 ‘당구를 학교에서 얼마나 배우냐’며 학교체육에 대한 중요성이나 인식이 부족했다. 이런 편견들이 깨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가영 선수는 2003년 US오픈 9볼 결승에 진출했다. 세계적인 무대 결승에 처음 올라간 김가영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지막 한 공을 남긴 채 인터벌을 잡고 나서 샷을 했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정상 바로 앞에서 고배를 마셨다.
절치부심한 김가영은 다음해 같은 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또한 1년 전과 비슷한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마지막 9볼을 성공시키며 전년도 준우승의 아픔을 깨끗이 씻어냈다. 새로운 포켓볼 여제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가영은 이후 세계선수권 등 각종 주요대회를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당시는 이런 경기들이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을 통해 생중계됐으니 김가영이란 이름을 미국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김가영 선수가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안 차유람 선수는 국내에서 서서히 실력을 쌓고 있었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 두 선수가 나란히 국가대표로 나가기도 하고, 활동무대가 서로 달랐던 두 선수는 가끔 국내대표 선발전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포켓볼 인기가 사그라질 때 필자는 미국 드래곤프로모션 소속 자넷리와 함께 국내 방송사들과 이벤트 경기를 열었다. 이때 차유람은 자넷리와의 결승에서 대결하며 주목을 받았고, 다음날 포털 실시간 검색 1위를 찍으며 새로운 스타탄생을 알렸다.
국제 무대에서는 김가영 선수가, 국내 무대에서는 차유람 선수가 인기를 얻으며 제2의 포켓볼 부흥기를 이끌어냈다. 차유람 선수가 결혼으로 은퇴했던 2010년 중반까지 두 선수의 라이벌 대결은 대중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필자 개인 생각으로는 차유람과의 라이벌 관계가 끝난 것도 김가영 선수가 포켓볼에서 3쿠션으로 옮긴 계기 중 하나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선수가 LPBA 3쿠션 무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피할 수 없는 영원한 라이벌이란 생각이 든다. 결혼 후 은퇴한 차유람 선수는 필자에게 포켓볼은 아버지 권유로 한 것이고 자신이 좋아서 한 적은 별로 없다며 이제는 당구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3쿠션으로 다시 당구 큐를 잡겠다고 해서 당시 필자 포켓클럽(컬러오브머니)에 3쿠션 대대를 놓고 연습을 시작했다.
앞으로도 두 선수 라이벌전은 LPBA에서 계속 될 것이고, 이는 당구팬들에게는 재미있는 흥밋거리가 될 것이다. 두 포켓볼 챔피언의 새로운 도전이 어려운 여건에서 세계포켓볼 챔피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길 기대한다. [조필현 대한당구연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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