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한 알뜰통신사가 법인 차원에서 외국인 명의 불법 대포폰 유통에 관여한 정황이 포착됐다. 해당 통신사는 외국인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취득해 당사자 동의 없이 휴대전화를 7만건가량 개통하고 이를 보이스피싱 범죄조직 등에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처럼 알뜰통신사의 조직적인 불법 유통행위로 인해 지난해 외국인 명의 대포폰 적발 건수도 급증했다.
22일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이 적발한 대포폰은 총 9만7399건으로 집계됐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가운데 외국인 명의로 개통된 휴대전화 회선이 전체 적발 건수 중 73.3%인 7만1416건에 달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명의 대포폰 적발 건수는 2023년 2903건에서 지난해 7만건을 넘어서며 1년 만에 약 25배 늘어났다. 외국인 명의 대포폰이 한 해에 7만건 이상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이 보이스피싱 범행 수단에 대한 특별단속을 실시한 2021년에 적발된 외국인 명의 대포폰 건수(2만4296건)와 비교해서도 3배에 달한다.
외국인 명의 대포폰 중 상당수는 특정 알뜰통신사에서 개통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불법 수집한 외국인 여권을 이용해 선불유심 등 대량의 대포폰 회선을 개통한 뒤 범죄조직에 제공한 알뜰통신사를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적발은 경찰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활용된 휴대전화 회선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경찰은 대포폰 회선 개통에 연루된 알뜰통신사 대리점과 보이스피싱 범죄 하부 조직원 등을 2023년 말 입건했다. 이후 수사를 이어가면서 전국에 분포된 해당 통신사 대리점들이 대포폰 개통·유통 범죄에 연루된 사실을 확인했다. 1개 수사팀에서 적발한 외국인 명의 대포폰 회선만 1만200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알뜰통신사 본사가 대포폰 유통에 가담한 정황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일부 알뜰통신사 대리점이 영업 실적을 올리기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과 접촉해 대포폰을 유통한 사례는 있지만, 업체 차원에서 불법행위를 공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 관계자는 "일부 대리점의 일탈행위가 아니다. 대포폰이 무분별하게 유통되는 데 대해 알뜰통신사가 관여한 정황이 있다"면서도 "수사 중인 사건이라 구체적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법인 대표자부터 본사 임직원과 대리점주는 물론 보이스피싱 하부 조직원까지 이번 사건으로 입건된 인원은 100명이 넘는다.
이번 사건은 외국인 명의 휴대전화 관리 체계의 구조적 취약점을 드러낸 사례라는 지적도 나온다. 알뜰폰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외국인 명의 회선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구멍은 여전하다. 2020년에는 6개월 단위로 실시하던 휴대전화 회선 본인 확인 주기를 4개월 단위로 단축했다. 지난해에는 동일 명의의 다회선 가입 제한 기간을 기존 30일에서 180일로 연장했다. 이 같은 조치를 취하고도 알뜰통신사 한 곳에서 대포폰 회선이 1년여 만에 7만개 이상 개통되는 일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다. 과기정통부는 어느 업체에서 문제가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단기간에 외국인 명의 회선이 급증한 경우에 대한 사후 점검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포폰 유통업자는 브로커를 통해 외국인 여권 사본이나 외국인등록증 사본을 건당 3만원 선에 구입하고 대포폰 1회선당 30만원 안팎에 팔고 있다. 이렇게 판매된 대포폰은 보이스피싱 조직이나 불법 스팸 업자 등에 의해 15~30일 쓰이다 해지된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명예교수는 "대포폰을 개통해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에 유통한 사실이 적발되더라도 재판에선 대부분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비용보다 이익이 크다고 보는 탓에 대포폰 유통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문광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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