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위안부·강제징용 배상안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한일 관계가 미래로 나아갈 모멘텀을 마련하게 됐다. 국제 통상·안보 질서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실질적인 협력을 끌어내고자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에 나섰다는 평가다.

이 대통령은 21일 공개된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과거사 문제 △경제·안보 협력 △북한·중국 정책 등에 대한 생각을 자세히 밝혔다.

보수성향 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일본 오피니언리더를 향해 메시지를 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시종일관 미래에 방점을 찍었다. 과거사를 두고선 "사실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면서도 "문제에 너무 매몰돼선 안 되며 현실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도움이 되는 일은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일 정책을 밀어붙였던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된 지점이다.

한일 경제·안보 협력을 강조한 것도 눈에 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며 통상·무역 분쟁이 격화하고 있는 데다 주한미군·주일미군 역할을 재조정하라는 압박을 함께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이 공동 대응에 나설 필요성이 커졌다는 것이 이 대통령의 생각이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의사도 밝혔다. CPTPP는 일본을 비롯한 12개국이 참여하는 소다자주의 통상질서로 일반적인 자유무역협정(FTA)보다 높은 시장 개방 수준을 보인다. 한국은 가입 시 공급망 안정과 경제 협상력 제고가 기대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동아시아를 포함한 태평양 연안국의 경제협력기구를 확고하게 만들어 나가는 일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다만 대통령실에선 CPTPP를 정상회담의 공식 의제로까지 다루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고 봤다.

이 대통령은 민주 정부에선 금기시됐던 안보 협력으로까지 지평을 넓혔다. 북한·러시아의 군사협력이 심화하고 있는 안보 환경을 고려했다. 친중(親中) 정부라는 서방 조야의 오해도 씻어내고 한·미·일 공조를 강화할 수 있는 카드라는 평가가 나온다.

인적·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한 배경으로는 양국 국민이 편하게 오가며 서로를 만나야 경제·안보 협력의 기틀을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6월에만 한시적으로 시행했던 한일 전용 입국심사를 재설치할 수 있다는 방침을 밝혔다. 친근감을 드러내려고 일본 문화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 관한 역사소설인 '대망'을 통해 일본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며 "도쿠가와의 인내심을 존중하며 정치에 있어서 배울 점이 많다"고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일본에도 한반도 평화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냈다. 안정적으로 남북 관계를 관리해야 일본도 안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면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3단계 정책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에 힘을 실어 달라는 신호로 읽힌다.

이 대통령은 "1단계는 핵·미사일 동결, 2단계는 축소, 3단계는 비핵화"라며 "미국과 긴밀한 공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적극적인 남북대화를 통해 핵을 동결·축소·폐기할 여건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앞서 조현 외교부 장관이 3단계 정책을 공개했으나 이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단계적 비핵화 구상은 문재인 정부에서 공을 들였던 '핵동결 입구→비핵화 출구' 해법을 재추진하겠다는 의미다.

우선 북한과 한미 등 국제사회가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해 로드맵을 설정한 다음에 '핵동결→핵능력 축소→비핵화' 등 단계를 설정하고 실질적 비핵화 행동과 부분적 제재 완화 등 상응 조치를 맞교환하는 방식이다. 북측이 합의를 위반하면 기존 제재를 되살리는 '스냅백' 방식의 안전장치도 둔다.

이 대통령도 20대·21대 대선 후보 시절에 스냅백 방식의 단계적 비핵화가 가장 현실적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이 단계적 비핵화론에 호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문재인 정부 때와 달리 불가역적 핵보유를 주장하며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러 차례 북한을 핵보유국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도 단계적 비핵화 구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과 북한이 단기적 성과에 집착해 스냅백 방식이 아닌 핵 동결·군축과 제재 완화를 맞교환하는 스몰딜에만 머물러 '나쁜 합의'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 목표에 합의하더라도 각 단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도 난제다. 트럼프 행정부 1기는 단계를 줄이고 북측이 1단계에서 되도록 많은 비핵화 선(先)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북한이 상당한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취해야 제재 완화를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도 유지했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 단계를 세분화하고 각 단계마다 보상을 받아내려는 '살라미 전술'에 주력했던 바 있다.

[성승훈 기자 /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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