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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에서 Love로 Z세대, 텍스트힙에 빠지다 [스페셜리포트]

  • 나건웅,조동현,정혜승,정수민
  • 기사입력:2025.01.31 14:40:06
  • 최종수정:2025.01.31 14: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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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독서 토론을 한다. 이미지와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그간 외면받아온 ‘텍스트’가 유행의 한가운데 우뚝 섰다. 텍스트 열풍을 일으킨 건 그 누구도 아닌 1020 젊은 세대다.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던 활자 문화가, 젊은 세대에겐 오히려 신선하고 ‘힙’하게 다가오는 덕분이다.

‘텍스트힙’이 요즘 대세 키워드로 떠올랐다.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개성 있고 쿨하다는 뜻의 ‘힙’을 합성한 신조어다. 젊은 층 사이에선 책을 읽는 스스로를 ‘멋지다’ ‘뿌듯하다’ 느끼며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트렌드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확산 중이다. SNS에는 독서 기록을 공유하고 오프라인에선 독서 모임을 만든다. SNS도 사진·영상보다 텍스트로만 소통하는 앱이 더 각광받는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텍스트힙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로 치달은 모습이다.

독서 모임 플랫폼 ‘트레바리’는 텍스트힙 트렌드에 힘입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2030 신규 회원이 크게 늘며 누적 회원 11만명을 돌파, 매달 약 500개 모임에서 수천 명이 만남을 갖는 커뮤니티로 진화했다. (트레바리 제공)
독서 모임 플랫폼 ‘트레바리’는 텍스트힙 트렌드에 힘입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2030 신규 회원이 크게 늘며 누적 회원 11만명을 돌파, 매달 약 500개 모임에서 수천 명이 만남을 갖는 커뮤니티로 진화했다. (트레바리 제공)

매일 매일 독서하고 필사하고

‘독파민’ ‘오독완’ ‘책꾸’ 등 신조어

텍스트힙 열풍은 젊은 세대가 주로 쓰는 SNS에서부터 확인된다. 인스타그램에 ‘북스타그램’이라는 태그를 걸고 포스팅한 게시글은 600만개를 훌쩍 넘어간다. 보통은 책을 읽는 모습을 인증한다든지,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글귀를 공유하고 짤막한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식이다. 1년에 읽을 책 권수를 정해놓고 독후감을 차곡차곡 업데이트하는가 하면 꾸준히 필사 노트를 게시하는 이도 많다.

텍스트힙과 관련된 다른 신조어도 여럿이다. 독서할 때 오히려 도파민이 나온다는 ‘독파민’을 비롯해 ‘독붐온(독서 붐은 온다)’ ‘오독완(오늘 독서 완료)’ ‘오쓰완(오늘 쓰기 완료)’ 같은 단어가 책 관련 게시글마다 포착된다. 그간 독서 문화를 밀어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SNS가, 요즘엔 오히려 독서를 ‘흥하게’ 하는 채널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1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에 짤막한 독후감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는 취업준비생 김가은 씨는 “단순히 과시나 허세라기보다는, 일상에서 부족했던 지적 호기심을 좇는다고 표현하고 싶다”며 “내 생각을 공유한다는 재미와 나날이 쌓여 가는 게시글을 보고 있자면 계속 책을 읽을 동기부여도 된다”고 말했다.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는 “텍스트힙은 새로운 세대 등장과 맞물려 있다. 젊은 세대는 항상 새로운, 또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려고 한다”며 “영상과 이미지에 익숙한 윗세대와 단절 혹은 차이를 부각시키고 자기 세대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평가했다.

다른 이에게 자극을 받아 북스타그램을 시작하는 이도 많다. 이름 모를 타인이나 또래로부터의 자극도 있겠지만, 아이돌 등 젊은 세대에 특히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도 한몫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유튜브에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추천하자, 이 책은 지난해 상반기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배우 한소희가 추천한 800페이지짜리 철학 서적 ‘불안의 서’는 출간 10년 만에 돌연 품귀 현상을 겪기도 했다.

인플루언서 영향력을 확인한 독서 플랫폼에서도 잇따라 연예인 모델 활용에 나섰다. 밀리의서재에서는 배우 김태리가 소설가 김애란 단편집 ‘바깥은 여름’을 낭독하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아이돌 그룹 더보이즈(TBZ)의 주연과 트와이스 다현, 배우 강동원은 예스24 캠페인에 참여해 인생작 리스트를 공개하기도 했다.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역시 텍스트힙,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인 계기가 됐다. 대표작인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은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를 휩쓸었다. 노벨상 수상 엿새 만에 그의 작품 100만부가 팔려나가는 기록을 쓰기도 했다.

대학가에서도 문학이 대세가 됐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지난해 학부생 도서 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 7년 만에 처음으로 전공 서적 대출 순위가 10위권 내에서 사라졌다. 대신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롯한 소설이 8권, 산문과 수필이 각각 한 권씩 포진했다. 지난해 고려대 도서관 역시 가장 많이 빌린 책 상위 10권 중 8권이 소설, 이화여대도 9권이 소설이었다.

텍스트힙 열풍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서점가와 문구 업계는 책 표지 등을 취향껏 꾸미는 이른바 ‘책꾸’ 소품을 여럿 내놓으며 매출을 끌어올렸다. 북커버, 인덱스, 라벨 스티커, 책갈피 등이다. 책꾸하기 알맞은 일부 책들 역시 판매량이 급증했다. 표지에 여백이 많거나 단색으로 통일된 ‘문학동네시인선’ 시리즈, ‘위즈덤하우스 단편소설 위픽’ 시리즈 등이다. 전년 대비 판매가 두 자릿수 가까이 늘었는데 구매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대였다.

서점가뿐 아니다. 최근 삼성증권이 최근 고객용으로 펴낸 책 ‘헤리티지 솔루션’에서도 트렌드를 엿볼 수 있다. 초부유층 자산가 고객을 대상으로 절세·부동산 노하우를 정리한 책인데, ‘슈퍼리치도 텍스트힙’이라는 홍보 문구를 전면에 내세웠을 정도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요즘에는 일부러 표지를 단순화하거나 아니면 책꾸에 필요한 스티커를 함께 증정하는 등 이벤트를 기획하는 빈도가 늘었다”며 “이 밖에도 ‘글귀가 좋은 책’ ‘필사에 좋은 책’ 등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는 경향도 커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텍스트힙과 ‘책꾸’ 열풍에 출판사들이 내놓은 책 꾸미기 에디션과 리커버 에디션. (예스24 제공)
텍스트힙과 ‘책꾸’ 열풍에 출판사들이 내놓은 책 꾸미기 에디션과 리커버 에디션. (예스24 제공)

온라인 세계에 번지는 텍스트힙

블로그·스레드 등 텍스트 기반 SNS

독서라는 행위는 오프라인에서 이뤄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텍스트힙 주 무대는 ‘온라인’이다. 비단 SNS용 독서 인증샷이 넘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엔 사진이 아닌, 텍스트에 기반한 SNS 앱이 다시 대세로 떠올랐다. 모바일로 간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 앱’도 연일 덩치가 커지는 중이다.

달라진 SNS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플랫폼은 의외로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네이버 ‘블로그’다. 사진이나 짧은 글에 치중된 여타 SNS에 비해 비교적 긴 글을 중심으로 운영돼온 채널이다.

블로그는 텍스트힙 트렌드에 힘입어 요즘 ‘회춘’에 성공했다. 1020 사용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2022년 1월, 달에 한 번 이상 블로그 앱을 사용한 10대 이용자는 35만명이다. 지난해 12월에는 58만명까지 급증했다. 같은 기간 20대 이용자 수(75만명→98만명)도 크게 늘었다. 반면 30대부터 60대 이상 연령대별 이용자는 되레 소폭 줄었다. 블로그 최근 인기를 1020이 이끌고 있다는 얘기다.

블로그 콘텐츠도 1020 중심으로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한 해 새로 개설된 블로그가 2023년 136만개에서 지난해에는 216만개까지 증가했다. 연령대별 신규 창작자의 전년 대비 증가율 역시 10대(55%)와 20대(52%)에서 크게 올랐다.

2022년 여름부터 문학과 책을 주제로 블로그 운영을 시작, 지난해 ‘이달의 블로그’에 오른 갱고흐(아이디) 씨는 “유튜브처럼 촬영이나 편집할 필요 없이 오롯이 ‘나의 이야기’만 있으면 된다는 점이 블로그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인스타그램처럼 ‘누가 더 좋은 곳을 다녀왔냐’는 경쟁 심리가 아니라, 바쁜 일상 속 기록을 쌓아 나가고 긴 글로 마음껏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블로그뿐 아니다. 텍스트 SNS 앱은 그야말로 대세다. 과거 ‘트위터’에서 이름을 바꾼 ‘X’, 그리고 메타가 운영하는 ‘스레드(Threads)’가 대표 주자다. 둘 모두 간단한 텍스트로 ‘일상이나 평소 느낀 점’을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두 앱은 이용자 증가세가 뚜렷하다. X의 월 이용자 수는 2023년 12월 기준 610만명에서 지난해 12월 665만명으로 늘었다. 스레드 우상향 곡선은 더 가파르다. 같은 기간 164만명에서 463만명까지 3배 가까이 늘었다. 익명의 공간에서 주로 ‘반말’로 대화하는 스레드 특유의 친근한 정서가 국내에 먹혔다는 평가다.

역시나 10대와 20대에서 반응이 뜨겁다. 연령대별 SNS 앱 이용 순위를 보면 알기 쉽다. 10대에서는 인스타그램에 이어 X가 2위, 스레드는 9위다. 20대에서도 역시 X는 2위, 스레드는 6위에 위치한다.

반면 40대 이상을 살펴보면 두 앱 모두 순위가 확 떨어진다. 40대·50대·60대 이상 모두 네이버 밴드가 1위를 차지했다. 50대와 60대 이상에서 X가 모두 9위로 턱걸이 진입에 성공했지만 스레드는 10위권 밖이다. 국내 한 대형 SNS 기업 관계자는 “40대 이상에서는 밴드·페이스북·카카오스토리처럼 사진으로 근황을 공유하는 SNS가 대세다. 반면 1020세대에서는 텍스트 앱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며 “젊은 세대에서 짤막한 글로 소통하는 문화를 ‘힙’하다고 여기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설명했다.

‘모바일 독서 인구’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밀리의서재’ ‘리디’ 같은 독서 플랫폼이 확보한 도서 수가 늘고 서비스도 꾸준히 업데이트되면서다. 책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제약 없이 언제든 편히 독서를 할 수 있는 데다 요즘엔 메모·필사 같은 기능이 생기면서 더 관심이 뜨겁다.

밀리의서재 누적 가입자는 2020년 287만명에서 2022년 532만명, 지난해 10월 기준으로는 835만명을 넘어섰다. 모든 연령대에서 20대 회원이 가장 많다. 30대 이하 회원이 전체 60%에 달한다. 개인 독서 기록장처럼 활용할 수 있는 ‘밀리 포스트’, 책 본문에 형광펜을 치거나 밑줄을 그을 수 있는 ‘하이라이트’, 영화처럼 짧은 감상평을 공유하는 ‘한 줄 리뷰’ 등 기능은 매달 이용자 수가 늘어나는 중이다. 지난해 12월에는 전자책에서도 종이책처럼 자유롭게 필기할 수 있는 ‘필기 모드’, 온·오프라인 독서 활동을 통합 관리하는 ‘독서 기록’ 같은 새 기능도 선보였다.

리디 월 이용자 수도 증가세다. 지난해 12월 기준 월 이용자 수는 160만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8만명 가까이 늘었다. 밀리의서재(95만명)를 훌쩍 웃돈다. 특히 경쟁 앱 밀리의서재에는 없는 한강 작가 책을 취급한다는 점에서 최근 더 각광받았다. 마음에 드는 문구를 이미지로 바꿔주는 ‘멋지게 공유하기’와 최근 텍스트힙 트렌드에 발맞춘 ‘필사 큐레이션’이 사랑받는 기능이다.

요즘은 서점가와 출판업계도 앱을 통해 독서 습관을 돕는다. 교보문고에서 만든 앱 ‘리드로그’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저장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카메라로 책 문장을 찍으면 대신 입력해주는 ‘문장 가져오기’ 기능도 있다. 이 밖에 예스24는 책 표지를 촬영하면 구매와 상세 페이지로 연결하는 ‘도서 표지 검색’ 서비스를, 웅진북센은 독서 활동 통계 플랫폼 ‘바로보네’를 운영 중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텍스트힙 열풍은 젊은 세대의 소통 욕구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들이 글을 쓰고 말을 할 때, 거기 들어갈 내용을 고민하다 보니 책을 읽게 되는 것”이라며 “책은 사유가 집적된 총체다. 단순 SNS 게시글을 쓰고자 하더라도, 책을 읽어야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사진설명

진화 중인 ‘텍스트힙’ 트렌드

독서 모임·책방 투어…“더 많은 경험”

온라인을 주 무대로 했던 텍스트힙 열풍은, 최근에는 다시 다양한 오프라인 활동으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책을 매개로 소통하는 ‘독서 모임’, 소규모 독립 서점을 찾아다니는 ‘책방 투어’ 등 트렌드가 젊은 세대 중심으로 확산 중이다. 더 많은 경험과 더 깊은 소통에 대한 수요다.

독서 모임 플랫폼 ‘트레바리’는 텍스트힙 트렌드에 힘입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트레바리는 국내 독서 모임 플랫폼 대표 주자다. 2015년 9월 설립 이후 벌써 11년 차를 맞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위기를 맞이했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난해부터 2030 신규 회원이 크게 늘며 누적 회원

11만명을 돌파, 매달 약 500개 모임에서 수천 명이 만남을 갖는 커뮤니티로 진화했다.

트레바리는 ‘유료 서비스’ 그리고 ‘독후감 의무’라는 정책으로 차별화했다. 회비는 4개월에 약 30만원. 적잖은 돈이지만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이들만 모인다’는 일종의 자체 진입장벽으로 기능하는 모습이다. ‘400자 이상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석이 불가하다’는 정책도 비슷하다.

회원들끼리 토론뿐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도 호평 받는다. 예를 들어 문학비평가와 함께 읽는 문학 모임, 데이터 분석가와 함께하는 그로스 마케팅 실천법, 전 한국은행 국장과 함께 읽는 영국 이코노미스트 잡지 등이다. 독서 외에 같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도 인기 비결이다. 예를 들어 야구와 관련된 책을 읽는 독서 모임 ‘야구야구-임당’에선 멤버들이 함께 야구장 직관을 다니고, 책과 영화를 함께 즐긴 후 토론하는 ‘북씨’에서는 주기적으로 영화관을 찾는 식이다. 물론 이런 기타 모임은 모두 자율이다.

윤수영 트레바리 대표는 “독서 모임은 누구나 갖고 있는 배움 욕구나 외로움 극복에 대한 열망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정보 소비 방식이 변화하더라도 텍스트 기반 콘텐츠는 여전히 심도 있는 소통과 관계를 형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매개체다. 본인이 관심 있는 취미와 취향에 더 빠르고 깊게 파고들기를 원한다면, 연령 불문 텍스트를 더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트레바리 외에도 다양한 독서 모임 플랫폼이 늘어나는 중이다. 예스24는 지난해 8월 독서 커뮤니티 서비스 ‘사락’을 새로 선보였다. 사락 모임은 독자가 자유롭게 참여하는 ‘일반 모임’, 그리고 작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작가 모임’으로 나뉜다. 출범 6개월 만에 1500개 이상 독서 모임을 운영하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밖에 일반 독서 동호회에서 플랫폼 사업으로 확장한 ‘아그레아블’, 온라인 독서 모임으로 전 세계 각지에 거주 중인 작가가 참여하는 ‘세모람’, 저마다 독서 모임을 자유롭게 꾸릴 수 있는 툴을 제공해주는 플랫폼 ‘그믐’ 등이 있다. 최근에는 당근 같은 커뮤니티 앱에서도 독서 모임 개설이 활발히 늘어나는 중이다.

특색 있는 책방과 독립서점을 돌아다니는 ‘책방 투어’도 인기다. 타인과 소통보다는, 자신만의 독서 경험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공간을 찾고자 하는 수요다.

저마다 특색을 갖춘 독립서점이 ‘핫플’로 자리매김 중이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에서 운영 중인 독립서점 ‘무수책방’은 ‘편안함’이 콘셉트다. 중앙에 위치한 소파와 테이블, 이를 둘러싸고 있는 목재 서가가 마치 집 안 거실을 연상케 한다. 단순 책 구매를 넘어 ‘함께 글쓰기’ ‘함께 희곡 읽기’ ‘명상’ 같은 여러 참여 이벤트도 진행한다.

책에 술을 더해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인기다.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뒷골목 지하에 위치한 ‘문학살롱 초고’는 낮에는 카페, 밤에는 바(bar)로 운영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는 ‘살롱’을 모티브로, 독서와 토론을 즐길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다. 서울 연남동 ‘책크인’ 역시, 창가에 기대 여행 서적을 읽으며 와인을 즐기는 감성으로 입소문을 타며 명소로 떠올랐다.

일반 서점에서 구하기 힘든 추리소설을 모아놓은 ‘미스터리 유니온’, 약사 겸 책방 대표인 박휼륭 씨가 약국 안에서 운영 중인 ‘아직 독립 못 한 책방’, 에세이 작가와 영화감독이 함께 운영하는 영화 독립서점 ‘영화책방 35㎜’, 사진집만 취급하는 ‘아라선’도 독특한 개성으로 눈길을 끈다.

더 사적인 독서 공간을 원하는 이를 겨냥한 ‘예약제 서점’도 새 트렌드다. 서울 덕수궁 인근에 위치한 ‘마이시크릿덴’은 대화가 금지된 예약제 서재다. 돌담길과 나무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독서와 사색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예약제’와 ‘여행’을 접목한 서점도 젊은 세대 관심을 끈다. 강화도에서 운영 중인 ‘이루라책방’은 동화 작가 김영선 씨가 운영하는 북스테이 전문 책방이다. 전원주택처럼 설계된 책방으로 예약자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숙박을 하며 자유롭게 북카페와 책방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독서 모임 ‘아그레아블’은 일반 독서 동호회에서 플랫폼 사업으로 확장한 사례다. (아그레아블 제공)
독서 모임 ‘아그레아블’은 일반 독서 동호회에서 플랫폼 사업으로 확장한 사례다. (아그레아블 제공)

텍스트힙, 어떤 식으로 진화할까

내가 쓴 글로 모임하는 ‘스토리클럽’

텍스트힙 열풍은 앞으로도 진화해나갈 것이란 의견이 많다.

먼저 ‘장르’ 관점이다. 시 같은 짧은 글이나 실용 서적에서 순수 과학이나 인문학 쪽으로 번져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숏폼이나 요약 콘텐츠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해갈할 전문 서적, 이른바 ‘벽돌책’이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현재 1020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에 중장년층이 자극을 받아 전국적인 ‘독서 붐’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읽기 열풍이 ‘쓰기 열풍’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개개인이 독자를 넘어 한 명의 작가를 표방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한다”며 “남이 쓴 책이 아니라 자기가 쓴 편지나 시를 가지고 독서 모임을 하는 영국 ‘스토리클럽’ 문화가 한국에도 번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비관론도 있다. 유행은 일시적이며 텍스트힙 열풍이 언제든 꺼질 수 있다는 의견이다. 최근 텍스트힙 현상은 ‘텍스트’ 그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를 매개로 한 ‘관계 맺기’에 더 무게가 쏠려 있다는 평가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젊은 세대는 유행을 나누며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 하는 성향이 있다. 달리기를 매개로 한 ‘러닝 크루’ 같은 문화가 대표적”이라며 “최근 텍스트힙 열풍은 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개인화되고 있는 요즘 청년층에 대한 반작용 같은 개념으로 본다”고 말했다.

열풍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불확실하다.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세대가, 텍스트가 아닌 다른 매개체로 금방 옮겨갈 가능성도 없잖다. 하지만 오랜만에 도래한 ‘독서 붐’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재근 평론가는 “최근 텍스트힙 현상엔 분명 허세와 과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 자체가 원래 허영 의식이 아니겠는가”라며 “독서를 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게 중요하다. ‘텍스트힙 열풍’에서 ‘독서 열풍’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사회 전체에서 봤을 때 중요하겠다”고 말했다.

트레바리 독서 모임, 직접 가보니
‘나 홀로 독서’에선 배울 수 없는 각자의 삶
1월 22일 서울 강남에 있는 트레바리 아지트에서 ‘최소한의 금융경제’라는 이름의 독서 클럽이 열렸다. (조동현 기자)
1월 22일 서울 강남에 있는 트레바리 아지트에서 ‘최소한의 금융경제’라는 이름의 독서 클럽이 열렸다. (조동현 기자)

1월 22일 오후 7시 40분. 서울 강남에 있는 트레바리 아지트에선 금융과 경제를 주제로 ‘대화의 장’이 열렸다. ‘최소한의 금융경제’라는 이름의 독서 클럽이다.

참석자는 15명. 면면은 다양했다. 금융권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도 있고, 경제 지식은 부족하지만 관심을 키우고자 온 사람도 있다. 모임을 이끄는 최찬영 클럽장은 JP모건 등 금융권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 시장과 투자에 대한 현실적 관점을 제공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월가의 현자’로 유명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저서 ‘행운에 속지 마라’를 읽고 난 뒤 대화를 나눴다. 책의 핵심 주제는 ‘운의 중요성’이다. 탈레브는 불확실성이 만연한 시대에서 투자와 삶의 성공이 종종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불편한 진실을 강조한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자기 일상을 책에 투영해내는 모습이었다. 항공기 리스 기업에서 리스크 관리를 담당한다는 황현지 씨(가명)는 “세일즈팀과 리스크 관리팀 간의 긴장이 늘 존재한다”면서 “수익을 좇는 팀과 리스크를 제지하는 팀의 갈등 속에서 불확실성을 감내하며 균형을 잡는 것이야말로 품격 있는 투자인 것 같다”고 풀어냈다. 스타트업에 재직 중이라는 김영빈 씨(가명)는 “모든 정보를 통제하려는 완벽주의가 오히려 손실을 키우곤 한다”며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도 불필요한 정보나 ‘판교어’와 같은 허세가 투자 결정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화는 ‘신호와 소음을 구분하는 법’을 둘러싼 토론이었다. 단기 투자 성과를 확인하며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 차분히 지켜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가 모였다. 비슷한 투자 실패 경험을 했던 터라 더욱 심금을 울렸다.

책을 읽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토론을 듣고 있자니 깨닫게 되는 바가 많았다. 책을 읽었더라면, 또 나만의 생각으로 독후감을 작성한 후였다면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저마다 다른 삶과 다양한 경험을 한 권의 책을 통해 공유한다는 점. ‘나 홀로 독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매력이 독서 모임에 있었다.

[나건웅·조동현 기자 정혜승·정수민 인턴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5호 (2025.02.05~2025.02.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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