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의 휘어진 기둥과 외나무 다리의 서정
해미읍성 순교터의 아픈 기억
서산으로 차를 몰았다. 교과서에서 보던 ‘백제의 미소’가 있는 곳. 마애삼존불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고, 개심사로 가 ‘아, 저렇게 살아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닮고 싶은 얼굴이었다.

말은 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다. 세월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할 말을 참고, 참고, 참고, 또 참다가 하고 싶은 백 마디 말 중에 겨우 한마디를 했는데, 지나고 나니 그 한마디 말마저도 괜히 했구나 하고 후회가 됐던 적이 많다. 나는 요즘 새벽마다 걷는다. 나이가 들어 새벽잠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운동으로도 하며,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살피기도 할 겸 겸사겸사다. 어쨌든 걸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6,000보 정도 걸어갔다가, 간 만큼 다시 걸어 돌아온다. 천변의 엄마 오리가 새끼들을 꼬리 뒤에 줄을 세우고 물가를 헤엄치는 것까지 보며 걷다 보면 다리가 아파오는데, 거기 위치한 열병합 발전소의 높이 솟은 굴뚝을 나만의 걷기 반환점의 지표로 삼고 있다.
그곳은 내가 만든 ‘말들의 무덤’이기도 하다. 나는 아픈 다리를 잠시 쉬기도 하면서 흰 수증기가 피어 오르는 굴뚝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내 속에 쌓인 후회와, 원망, 질투의 말들을 수증기와 함께 날려 보낸다. 그렇다고 다 날려 보내지는 않고 딱 글로 쓸 만큼은 남겨 둔다. 어떨 땐 굴뚝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을 때도 있고, 어떤 날엔 한 번 스윽 바라만 보고 돌아오기도 한다. 아무튼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와 아침을 먹는다.

그렇게 말을 참고, 참고, 참고, 참으며 사니까 후회가 조금은 덜하다는 걸 알게 됐다. 조금은 더 좋은 표정과 눈매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얼굴과 표정과 눈매는 살아온 세월의 이력이자 지금껏 가졌던 마음의 표상이다. 몇 해 전 서산 여행에서 내가 닮고 싶은 얼굴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이었다. 정식 명칭은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백제의 미소 앞에서 풀어지는 마음
마애여래삼존상은 백제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큰 암벽 중앙에 높이 2.8미터의 석가여래입상이 있고, 오른쪽에 미륵반가사유상, 왼쪽에 제화갈라보살입상이 있다. 볼에 가득 번진 미소가 너그럽고 온화해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다. 두툼한 얼굴에 커다란 눈과 반원형 눈썹, 넓고 얕은 코, 도톰한 볼살 등이 어우러져 우리가 흔히 보는 위엄 가득한 불상과 거리가 멀다. 옆집 아줌마 아저씨를 닮은 평범한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천 년이 훌쩍 넘은 세월 동안 바람과 비를 맞고도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는 이 미소는, 단순한 돌의 표정이 아니라 백제의 마음이자 우리 민족의 이상적인 ‘사람됨’의 표정이기도 하다.

이 불상은 어떤 사찰의 부속물도 아니다. 절터도 없고, 당우(규모가 다양한 집들)도 없다. 다만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조각된 세 분의 불상이 있을 뿐이다. 절집이 아닌 자연과 어우러진 불상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 근처의 바위 벽에 새겨진 삼존불은 마치 세속과 거리를 둔 채 세상 모든 이들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 표정엔 엄격함이나 권위 역시 없다. 부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옆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말없이 서 있곤 한다. 누구는 자신이 품은 슬픔을 조용히 풀어놓고, 누구는 어깨에 진 무게를 잠시 내려둔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도 있지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보다 돌아서는 이들도 많다. 그건 아마도 이 불상이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다만 ‘있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진정한 위로란 말이 아니라 ‘가만히 바라보는 연민의 얼굴과 표정’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과 함께 물놀이하기도 좋은 곳
마애여래삼존상에서 가기 전 용현계곡이 펼쳐진다. 이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용현자연휴양림에 닿는다. 길이는 약 2.7킬로미터. 용현계곡은 가야산이 품은 수려한 계곡으로 가야산 줄기인 석문봉 아래 옥양봉과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북동쪽 능선과 일락산에서 상왕산으로 연결되는 북서쪽 능선 사이에 길게 자리 잡았다. 수량이 풍부하고, 천연기념물로 보호하는 붉은박쥐(황금박쥐)와 수리부엉이, 가재와 반딧불이 등이 서식할 만큼 깨끗하다.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물놀이할 곳이 많다. 수심이 무릎 정도라 가족끼리 편안하고 안전하게 휴가를 만끽하기 적당하다. 계곡은 휴양림 쪽으로 갈수록 울창하고 깊어진다. 물소리도 더 커진다. 계곡으로 내려서면 숲이 우거져 초여름 따가운 햇빛도 들어오지 못한다. 강원도 어느 깊은 계곡에 들어선 것 같다. 계곡 주변은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화강암층인데, 물살이 오랜 세월 바위를 동그랗게 갈고 다듬어 만든 포트홀(깊게 파인 하천 침식 지형)이 눈에 띈다. 길가에 차를 대고 잠시 계곡으로 내려서 발을 담그니 그야말로 신선이 된 기분이다.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30분 이상 발을 담그고 있기 어렵다.
계곡 끝에 용현자연휴양림이 자리한다. 산등성이와 계곡 주변으로 숲속의집과 산림문화휴양관이 들어섰다. 산림문화휴양관은 3인실부터 6인실까지 객실 크기가 다양하고, 숲속의집은 6~10인이 숙박할 수 있다. 나무 목걸이 만들기, 독서대 만들기 등 다양한 목공 체험과 숲 탐방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휴양림에 가기 전에는 서산 보원사지(사적)가 눈에 띈다. 거대한 절집이 있던 터에 지금은 당간지주(보물)와 법인국사탑(보물) 등이 쓸쓸하게 남았다.

옛 순교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
서산에는 해미읍성이 있다. 읍내 한가운데 우뚝 선 성이 인상적이다. 조선 태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 5미터, 둘레 1.8킬로미터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우리나라 읍성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받는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읍성’이라 불린다.
읍성 안에는 동헌과 객사, 민속 가옥 등이 있다.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민속 가옥에서는 서산 지역 노인들이 재현하는 다듬이질이며 짚공예 등을 볼 수 있다. 남쪽의 정문 격인 진남루에서 동헌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둥근 담장을 두른 옥사(감옥)도 있는데, 이 옥사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었다. 서산과 당진, 보령, 홍성, 예산 등 서해 내륙 지방을 내포(內浦) 지방이라 일컫는데, 조선 후기 서해 물길을 따라 들어온 한국 천주교가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싹틔웠다. 19세기 이 지방에는 주민 80퍼센트가 천주교 신자였을 정도다.

당시 옥사에는 충청도 각지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로 가득했다. 옥사 앞에 커다란 회화나무가 있는데, 이 나뭇가지 끝에 철사를 매달고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고문하고 처형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 나무에는 사람을 매단 철사 자국이 있다. 신자가 많아 처형하기 힘드니 읍성 밖 해미천 옆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했다고 한다.
순교의 역사를 뒤로하고 바라보는 오늘날 읍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읍성 안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는데,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주민과 관광객의 모습이 유적지가 아니라 공원에 들어선 느낌이다.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 노는 아이도 있고, 투호나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을 즐기는 가족의 모습이 마냥 정겹다.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절, 개심사
해미읍성에서 나온 길은 운산면 목장 지대를 지나 개심사로 이어진다. 산속에 숨어 있는 듯한 이 절은 마치 ‘찾아가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진 곳 같다. 일주문에는 ‘상왕산 개심사’라는 편액이 걸렸다. 이응노 화백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일주문을 지나 10분 정도 솔숲을 걸어가면 무심한 듯 서 있는 절집을 만난다.

개심사는 백제가 망하기 불과 6년 전인 654년(의자왕14)에 창건되었으니 말 그대로 천년 고찰이다. 절을 창건한 혜감스님은 절의 이름을 개원사(開元寺)로 했으나, 고려 때인 1350년에 처능스님이 중건하면서 ‘마음이 열리는 절’이라는 뜻을 담아 개심사(開心寺)로 바꿨다고 한다. 개심사 해탈문에 들기 전, 외나무다리와 만난다. 반듯한 직사각형 연못에 큰 통나무 다리가 걸쳐 있다. 굳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경내로 들 수 있지만, 열에 아홉은 이 풍경에 반해 다리를 건넌다. 똑바로 걷지 않으면 빠질 것만 같은 다리. 누군가는 괜히 이 다리를 만든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나는 알 것도 같다. 우리는 늘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산다. 말도, 감정도, 인생도. 외나무다리는 그 중심을 시험한다.
개심사에는 외나무다리 말고 눈길 끄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각 가람을 받치는 기둥이다. 하나같이 굽었고 배가 불룩하며, 위아래 굵기가 다르다. 지금까지 봐온 매끈하고 다듬어진 기둥이 아니다. 나무를 전혀 손질하지 않고 원래 모습대로 썼다. 해탈문이며 범종각, 심검당 등이 대부분 그렇다. 특히 범종각 지붕을 받치는 네 기둥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모습이 오히려 파격적이다. 굽은 나무로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겉모습만 보면 어설프고 불균형해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 기둥이 오히려 절집 전체를 안정감 있게 받치고 있다. 목수는 억지로 자르거나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받아들였다. 우리 삶도 개심사의 기둥과 같은 모양일 것이다. 누구나 곧은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성공을 향해 똑바로 가고 싶어 하고, 관계에서도 갈등 없이 매끄럽게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의 삶이든 굴곡이 있고, 한때는 꺾이고, 한때는 주저앉기도 한다. 개심사의 기둥은 그 모든 굴곡이 오히려 더 단단함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완벽하지 않기에 더 단단하다.
개심사에서 내려와 서산을 나와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랐다. 차 안에서 나는 때때로 백미러를 보았다. 나는 언제쯤 그런 미소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말을 참으면, 더 걸으면, 더 깊은 눈동자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백미러에 비친 사내는 씨익 웃었다. 그 사내는 내일 새벽에도 말들의 무덤을 향해 걸어가리라.

운산면 여미리에 자리한 유기방가옥에서는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다. 100년이 넘은 고택으로, 지붕 위로 쏟아질 듯한 별이 가을밤의 운치를 느끼게 해준다. 시내에 자리한 서산동부시장은 해산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천국 같은 곳이다. 인근에서 잡아 올리는 낙지며 조개, 갑오징어의 싱싱함도 남다르다. 아이스박스에 포장해 주니 해산물 쇼핑을 즐겨보는 것도 좋다.
서산 여행의 종착점은 대산읍 삼길포항이다. 낚싯배를 빌려 당일치기로 낚시를 즐겨볼 수도 있고, 부두에 정박한 어선에서 맛보는 회도 별미다. ‘게국지’는 서산, 태안 지역에서 겨울 밑반찬으로 먹던 토속음식이다. 게장을 담갔던 국물에 묵은김치와 배추 등속을 넣어 끓여 먹는다. 서산시청 앞 진국집이 유명하다. 해미읍성 앞에 자리한 읍성뚝배기는 소머리곰탕으로 유명하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82호(25.06.0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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