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 정선, 신사임당, 단원 김홍도, 그리고 장승업이 남긴 화조화(花鳥畵) 77점을 모은 귀한 전시가 대구에서 열린다. 조선시대 굵직한 화업을 쌓아 화격(畵格)이 남다른 저들이 남긴 16~19세기 회화를 시대별로 배열해 조선미술사의 흐름을 조망하게 하는 전시다. 작년 9월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이 처음으로 여는 기획전 '화조미감(花鳥美感)'을 살펴봤다.
'꽃과 새'를 그린 그림이라니, 일견 따분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시실에 발걸음을 딛는 순간 편견은 사라지고, 연약해 보이기만 했던 붓 한 자루가 갖는 힘의 위압감에 입이 떡 벌어진다. 붓 한 자루로 예술을 완성했던 조선의 고매한 정신성이 초심자의 가슴에도 들이친다.
먼저 두 개의 화폭, 한 부자(父子)가 그린 새 두 마리가 눈에 띈다. 조속(1595~1668)의 '고매서작(古梅瑞鵲)'과 그의 아들 조지운(1637~1691)의 '매상숙조(梅上宿鳥)'다.
15세기까지만 해도 회화는 궁중의 채색화 중심이었고, 16세기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문인들이 그린 수묵화, 그중에서도 개인의 정신을 드러내는 화조화가 널리 유행했다 한다. 두 점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데, 따라서 이들이 그린 두 마리 새는 새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은유한 대상들이다.
아버지 조속의 까치 한 마리는 창공을 보며 기세가 등등하고, 아들 조지운의 새 한 마리는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본다. 고결한 수직성으로 고고한 이상을 표현한 아버지의 새, 포물선을 그리는 곡선의 대나무 위에서 겸손히 고개 숙인 아들의 새는 대조를 이룬다. '숭고함'과 '어우러짐'이란 상반된 주제가 두 화폭에서 서로를 겨냥한다.
발걸음을 옮기면, 겸재 정선의 '화훼영묘화첩'과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한 공간에 놓인 진풍경이 펼쳐진다.
활동 시기도 신사임당이 겸재보다 150년 이상 앞서고, 여성과 남성으로 성별도 다르며, 유교적 관념(이상)과 조선의 풍경(현실)을 그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있지만 '정제된 자연물의 사실적 묘사'란 점에서 꽤나 닮아 보인다.
이 중 겸재의 '화훼영모화첩'은 이번 기획전에서 가장 주목을 요한다.
충해로 인해 결손이 심했고, 8점의 그림 순서도 뒤죽박죽이어서 초기의 완성품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간송미술관은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지원을 받아 지난 2년의 시간을 들여 '화훼영모화첩'을 원화에 근접할 정도로 정교하게 수리해 관객 앞에 펼쳐놓았다.
8점 그림의 충해 흔적(벌레 먹은 자리)을 추적해 어느 그림이 화첩 안에서 마주보고 있었는지부터 결정했다. 특히 그림 속 개구리 등은 실제 금(金)을 사용해 다양한 안료에도 눈길이 간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단원의 탁월함의 결정적 증거는 '쌍치화명(雙雉和鳴)'이 아닐 수 없다.
한 쌍의 꿩이 조화롭게 우는 그림인데, 이 회화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당대엔 진경산수화가 크게 유행 중이었는데, 단원은 '진경산수화 속의 화조화'란 독특한 화풍을 이룩한 것. 먼 산은 옅게 하거나 아예 생략해 절제하고, 근거리만을 진한 먹으로 그려 그림 중앙으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위에 중심 소재인 꿩이 그려졌으니 초점이 모아져 이질감이 전혀 없다. 이랑 대구간송미술관 책임학예사는 "단원은 산을 그리되 그리지 않음으로써 아스라한 깊이감을 보여줬다. 사실주의와 서정의 완벽한 조화"라고 평했다. 전시는 8월 3일까지.
[대구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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