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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에 핀 작은 균에도 우주의 섭리가 있다면···

정연두 ‘불가피한 상황과…’ 展 느린 곡조의 블루스 화음 너머 고려인 청년의 슬픈 이야기 엮어 다큐멘터리적 서사성 짙은 전시 메주·막걸리 등 발효식품에 깃든 일상풍경 너머 우주적 리듬 주목 7월 20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서

  • 김유태
  • 기사입력:2025.04.29 08:55:09
  • 최종수정:2025.04.29 08: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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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불가피한 상황과…’ 展
느린 곡조의 블루스 화음 너머
고려인 청년의 슬픈 이야기 엮어
다큐멘터리적 서사성 짙은 전시

메주·막걸리 등 발효식품에 깃든
일상풍경 너머 우주적 리듬 주목
7월 20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서
부산 수영구 F1963 소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전경. [국제갤러리]
부산 수영구 F1963 소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전경. [국제갤러리]

블루스와 ‘메주’라니? 저 어울리지 않은 이색 조합으로 전시장에 32점의 작품을 소개하는 예술가가 있다. 정연두 작가(55)다.

부산 수영구 복합문화공간 F1963에 위치한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최근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The Inevitavle, Inacceptable)’이 개막했다.

‘블루스와 메주’라는 난해해 보이는 이 조합은, 그러나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순간 놀라울 만한 통일성에 감탄하며 고개를 숙이게 된다.

지난 25일 전시장에서 만난 정 작가는 블루스와 메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블루스의 리듬,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고려인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 눈엔 잘 보이진 않지만 ‘효능과 효과’를 넘어서는 균(菌)에 관한 서사를 한데 담았어요. 이질적이면서도 분명히 교차하고 있는 ‘리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 작가는 일상적인 사물의 특징적인 요소를 무형의 실로 결합한 뒤, 이를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음조로 엮어 펼쳐온 작가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전시장에 들어서면, 성인 키높이의 콘트라베이스를 튕기는 연주자의 스크린패널 영상이 먼저 관객을 맞는다. 이 영상의 주인공은 레이 설이란 이름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데, 중후한 저음의 악기 너머로 보컬, 색소폰, 오르간, 드럼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레이 설을 포함해 5개의 화면 속에서 연주자들이 협주 중인 것. 이들은 정 작가가 제시한 ‘67bpm의 느린 속도와 간단한 코드’에 맞춰 자기만의 블루스 음악을 풀어낸다.

연주자들의 화면은 보스턴, 서울 등지에서 각각 따로 촬영됐는데 전시장에서 비로소 만나 하나의 협주를 이룬다.

“블루스는 힘겨운 현실을 토로하는 장르잖아요. 그런 블루스 속에서 고려인 출신의 청년 보컬이 자신이 거쳐온 삶의 난관을 자기만의 가사로 풀어냅니다. 블루스와 고려인은 정주하지 못하는 현실, 이주라는 조건 때문에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화면서 고려인 청년 보컬 하헌진은, 구소련 지역에서 성장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현실을 힘겹게, 느리지만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한국의 겨울은 참 아름답고, 여름밤은 그저 동화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저는 한국인이 될 수 없습니다”란 가사가 그 옆 벽면에 액자로 붙어 있다. 디아스포라라는 삶의 궤적이 블루스라는 슬픈 음악과 만나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주자들의 영상 옆으로, ‘뜬금없이’ 처마에 걸린 메주를 촬영한 사진 십여 개가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정 작가가 ‘바실러스 초상(肖像)’으로 이름 븥인 사진들이다.

부산 수영구 F1963 소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전경. [국제갤러리]
부산 수영구 F1963 소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전경. [국제갤러리]

왜 하필 메주였고, 또 바실러스균이었을까.

“발효는 인간이 만드는 요리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발효에는 효능과 효과를 뛰어넘는 어떤 리듬이 숨겨져 있잖아요. 바실러스균은 메주가 최상으로 발효됐을 때 피는 균인데, 그래서 이번 전시장의 메주 사진엔 바실러스균들이 ‘꽃’처럼 핀 사진들을 모았습니다.”

블루스 협주곡과 균이 꽃핀 메주 사진을 둘러보다 보면, 한 남성이 밀가루 반죽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무르고, 비비고, 박수를 치고, 밀가루를 터는 손동작을 영상으로 찍은 ‘지휘자의 손’이란 작품인데, 이 전시장의 모든 음악은 저 요리사인 지휘자의 손동작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우연적 요소들을 모은 것만 같은 전시가 지휘자이자 창조자인 남성의 손동작으로 귀결된다.

전시장 마지막 공간엔 정 작가의 위트가 숨겨져 있다.

검은 우주의 성단을 찍은 사진인가 싶지만, 그게 아니라 검은 탁자에 밀가루를 턴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우주와 그 안의 인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미생물은 상호 조응한다.

정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골드스미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07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고 국립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미국 웨스트 팜비치 노턴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7월 20일까지.

정연두 작가
정연두 작가

부산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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