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평법을 적용하는 형평법원은 17세기 무렵 소송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서면으로 질문할 수 있도록 하고,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문서의 공개도 요구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해 재판의 공정성을 높였다. 상대방의 정보와 자료를 공개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이 제도를, 증거를 공개한다는 의미에서 디스클로저(disclosure)라 불렀다. 미국은 영국의 제도를 받아들인 다음 이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켰다. 소송 당사자는 법정 밖에서 증인을 신문한 다음 그 진술 내용을 증거로 제출하고, 필요한 경우 전문가에 의한 감정 절차도 밟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법정 밖에서 증거조사를 할 수 있는 절차를, 증거를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디스커버리(discovery)라 한다.
미국에서는 디스커버리 절차를 통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자료를 어렵지 않게 확보해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 디스커버리 절차에서 상대방 요구를 합리적인 이유 없이 거부하거나 거짓 자료를 제출하면 그 이유만으로 패소 판결이 내려질 수 있고, 담당 변호사가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증거 확보가 쉬워지면 사실관계가 빨리 확정되고 판사는 법률문제의 해결에 집중할 수 있다. 미국에서 민사소송의 90% 이상이 법정 밖에서 조정이나 화해 등으로 해결되고 있는 것은 이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소모되는 배심재판이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는 것도 이 제도 덕분이다.
원고가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상대방의 위법행위를 증명해야 하는데, 디스커버리 제도가 없는 한국에서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정보나 자료를 알아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소 또는 고발을 통해 수사기관의 힘을 빌려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 1만명당 고소 사건 접수율이 일본의 66배에 이르는 등 '민사의 형사화'가 심각한 문제다. 무고한 시민이 피의자가 되고, 형사사법의 정상적인 기능에도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최근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늦었지만 다행이다. 그러나 디스커버리 제도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법정 밖에서 증인을 신문하거나 감정 절차를 밟으려면 변호사 비용과 감정 비용 등 법정 안에서보다 훨씬 큰 비용이 필요하다. 또 개인의 사생활 정보나 기업의 영업비밀이 노출되는 위험도 따른다. 이런 점에서 이 제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국에서는 쟁점 사항에 관해 상대방에 대한 답변 요구나 증거 목록 제출 요구 등 주로 서면에 의한 사전 증거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서면을 통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면서 쟁점을 정리하는 한편, 증거 목록을 교환하고 필요한 서류를 받아 보는 서면 중심의 디스커버리는 큰 비용 부담 없이 시행할 수 있다. 이 과정에 법원이 적절히 개입해 사생활 비밀과 영업비밀을 보호해준다면 디스커버리 제도를 쉽고 빠르게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살리면서 단점을 최소화하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강일원 변호사(전 헌법재판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