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은 어딘가 예스럽고 감상적이다. 종종 허당, 허상, 허울이 따라붙기도 한다. 대개는 그 세 가지에 무너지고 말겠지만, 어떤 사람은 괜찮다. 허당이어도 사랑스럽고, 허상이어도 애잔하고, 허울이어도 기대고 싶은 이들이 있다. 최백호와 김사부, 임찬규가 그렇다.
금지된 낭만을 찾아 우선 향하는 곳은 노래방이다. 매우 독특한 한국적 상황인데 이게 다 최백호 때문이다.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면 도라지 위스키 없이도 취한다. 상처 깊은 목소리, 오래 묵은 울림이 만드는 공기의 흔들림은 노래 이상의 서사(敍事)다. 낭만을 넘어서는 '나앙만'이다.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도 있다. 실력 있지만 삐딱하고, 그래서 외로운 인물. 수많은 메디컬 드라마 중에서도 유독 오래 살아남았다. 뾰족함으로 위장한 무너진 속내가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야구장도 있다. LG 트윈스의 임찬규 선수가 대표적이다. 그의 초저속 커브는 제법 오래 지켜봐야 한다. 그는 후배의 호수비에, 공에 맞은 상대 선수에게 깊이 머리를 숙인다. 히어로 영화 속 약한 영웅 같다. 쥐어 터지면서도 끝내 중심을 지키는 캐릭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사람들은 타인에게는 간혹 낭만적이라 말하면서 정작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20대 시절, '20세기 최후의 로맨티스트'를 스스로 외치던 나는 어디로 갔는가.)
낭만의 문제는 결국, 속도의 문제다. 지금은 속도가 미덕인 시대, 모두가 서두르고, 줄이고, 생략한다. 그래서 낭만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중 두 가지를, 임찬규를 통해서 본다.
하나는 고통이다. 그는 원래 파워볼러였다. 하지만 팀의 암흑기 시절에 혹사당했고, 부상을 입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극대화했다. 지금 그가 던지는 커브의 곡선은 고통 극복의 궤적이다. 기준영은 소설 '다미와 종은, 울지 않아요'에서 "삶은 일종의 분투일 것이다. 아니, 겹겹의 노래인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여기서 '아니'는 부정이 아니라 수용의 뜻일 것이다.
두 번째는 유머다. 강한 멘탈에 솔직함을 더한다. 이런 일화가 있다. 차명석 코치(현 단장)가 말했다. "야, 임찬규. 코치로서 내 단점을 말해봐라." "없습니다." "하나라도 말해봐." "얼굴." "외모 말고, 이 자식아." 오래, 치열하게 버틴 사람만이 짧게, 가볍게 넘길 수 있다. 농담에도 서사가 있다.
느리게 간다는 건, 언뜻 보면 무력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주 단단한 반작용이다. 빨리 성공하지 못한 사람, 빨리 잊지 못한 사람, 빨리 포기하지 못한 사람. 낭만은 그런 사람들에게 허락된다. 그렇게 낭만은 저항이 된다. 효율에 대한 저항, 정답에 대한 저항, 무표정에 대한 저항. 지나간 어떤 일은 오래 생각난다. 오래된 것들이 제일 느리고, 그래서 자주 돌아온다.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산책'에서 "멋진, 멀리 도는 산책을 하다 보면 수많은 유용한 생각이 떠오른다"고 했다. 빠른 길보다 좋은 길이 있다.
다시 임찬규로 글을 맺는다. 누군가 마운드 위에서 시속 100㎞가 안 되는 공을 던진다. 힘이 아니라 궤도로 납득시킨다. 느림을 견딘 궤적은 더 깊고 오래간다. 올해에도 LG의 우승을, 나는 낭만적으로 희망한다.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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