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 당시 외무대신으로 있던 무쓰는 이듬해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까지 전쟁의 전 과정을 지켜봤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중국)에서 할양받은 랴오둥반도를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돌려주게 된다. 그는 이 과정을 '건건록(蹇蹇錄)'이라는 이름의 책에 자세히 남기며 후대가 참고해야 할 외교의 기본을 전하고 있다. 무쓰가 보여준 외교의 핵심은 '이념보다는 현실, 감정보다는 전략'에 따르라는 것이다. 전리품인 랴오둥반도를 돌려주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이들과 싸울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감정을 자제한 것이다. 이후 힘을 기른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해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에 앙갚음해준다.
무쓰의 가르침은 지금도 일본 정부 외교의 기본 지침이 되고 있다. 1951년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할 당시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 강국을 통해 국민이 빈곤과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이념보다는 현실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의 기본 틀이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잘 알려진 오히라 마사요시는 전략적으로 한일관계 정상화에 나섰고, 이는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조약 체결 60주년을 기념한 행사가 지난 19일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한국이 개최한 행사에 전·현직 총리 4명이 모였다. 이들을 포함해 경찰청이 밀착 경호한 인물만 12명에 달했다.
일본 정·관계가 놀란 것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직접 참석이다. 사흘 전 한국에서 열린 60주년 기념행사에 이재명 대통령은 불참했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관례를 생각하면 이시바 총리가 행사에 꼭 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 외교는 이념보다는 현실, 감정보다는 전략을 택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신호를 연이어 발산했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믿는 일본 정치인과 외교관은 거의 없다. 과거 사례를 보면 언제든 어떻게든 바뀔 수 있다고 본다. 현실보다는 이념, 전략 대신 감정을 우선하는 한국 외교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60주년 행사는 우리에게 만만치 않은 청구서가 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 이후 복잡해진 환경에서 일본 정부는 한일 관계 악화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일본이 최대의 환대를 했는데도 이재명 정부의 외교가 반일로 흐른다면, '한국이 잘못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발신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이 될 것이다.
도쿄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외무성 건물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무쓰 무네미쓰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역대 외무대신 중 동상이 있는 것은 무쓰가 유일하다. 그만큼 일본 외교관들이 그를 생각하는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이다.
받침대를 포함해 5m에 달하는 웅장한 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무쓰가 마치 이재명 정부 실용 외교의 끝이 무엇인지를 묻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이념과 감정에 치우친 외교는 우리 국민에게 좋지 않은 끝을 남겨줬다는 것이다.
[이승훈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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