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1571~1601년)는 고향 밀라노를 떠나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인 로마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독일에서 일어난 개신교 종교개혁의 거센 물결을 막기 위해, 가톨릭 교리를 신도들에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방안을 찾고 있었다.
독일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는 사제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스스로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금 세공업자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 인쇄기를 발명해 독일어 성서를 출판하고 유럽 전체에 정보 확산의 혁명을 일으켰다. 로마 가톨릭은 고민에 빠졌다. 개신교의 성서 번역과는 달리, 그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냈다. 중세 말기 피렌체의 조토나 프라 안젤리코 같은 화가들과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시도했던 것과 같은 대규모 성서화 제작이다. 이들은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가톨릭 신앙과 교리를 전파하였다.
당시 로마에서 교황 후원을 받아 성화를 가장 활발하게 그리던 화가는 주세페 체사리였다. 그는 유명한 화가들이 찾아와 화가 수업을 받는 화실의 책임자였다. 카라바조는 1593~1594년, 2년 동안 체사리의 작업실에서 꽃과 과일을 그리는 화가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은 카라바조가 체사리 화실에서 만난 시칠리아 출신 16세 소년 마리오 민니키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소년이 머리를 뒤로 약간 젖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빤히 우리를 바라보는 자신이 창피했는지, 귀가 빨갛게 상기되었고 뺨도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다. 이 소년이 빨간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이 사랑스러운 소년은 온갖 진귀한 과일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이전에 그린 복숭아 두 알과 말라비틀어진 포도송이가 담긴 ‘아픈 바쿠스(1593년)’와 전혀 다르다. 바구니에는 서로 다른 색을 띤 포도 네 송이, 사과 세 알, 복숭아 한 개, 모과나무 두 개가 담겨 있다. 진귀한 석류가 농익어 터져 분홍색 씨를 드러낸다. 무화과 네 송이 중 두 개는 연두색, 두 개는 검은색이다. 왜 카라바조는 이렇게 다양한 과일들을 그렸는가?
화가들 표현 방식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예술의 표현 방식을 ‘미메시스(mimesis)’라는 그리스 단어로 표현했다. 미메시스는 영어단어 ‘미믹(mimic)’과 같은 어원으로 ‘흉내’와 ‘재현’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흉내’다. 화가가 자신이 표현하려는 대상을 완벽하게 실재처럼 표현하려는 시뮬라르크 방식이다. ‘미메시스’의 두 번째 의미는 ‘재현(再現)’이다. 재현이란, 화가의 철학을 고취시켜 그 대상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방식이다.
젊은 카라바조는 자신의 그림이 완벽한 ‘시뮬라르크’가 되길 바랐다. 그는 과일과 이파리 같은 식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얼굴과 신체도 완벽하게 흉내 낼 실력을 갖추었다고 이 그림에서 선언하고 싶었다. 완벽한 흉내에 대한 예술 전통은 오래된 서양 예술 전통이다. 로마제국 작가이자 장군이었던 대-플린니(Pliny the Elder, 23~79년)의 책 ‘자연사’에 이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화가 제욱시스의 경쟁자는 파라시우스였다. 특히 파라시우스와 제욱시스는 최고 화가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송이가 어찌나 실제와 같았는지, 새가 날아와 앉아 포도를 쪼아 먹으려 했다. 파라시우스는 커튼을 그렸다. 제욱시스가 자신의 기교가 최고라고 확신하면서 파라시우스에게 말한다. 그는 자신의 포도송이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커튼을 걷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제욱시스가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파라시우스에게 존경을 표시하였다. 제욱시스는 새를 속였지만, 파리시우스는 화가 제욱시스를 속였다.”
카라바조는 이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으로 플린니가 묘사한 최고의 화가 자리에 도전장을 냈다. 그는 아마도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송이 같은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이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바구니 안에 있는 과일들의 모양, 색상, 색조, 명암뿐만 아니라 그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소년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시뮬라르크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소년의 드러난 어깨에 신성을 새기다
죽음 속에 숨겨진 생명, 어둠 속에 태어나는 빛
카라바조는 또 미메시스의 두 번째 의미인 자기 나름의 철학을 그림에 심어놓았다. 우리는 이 소년의 눈빛이 갈구하는 바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가장 에로틱한 노래인 ‘아가서’에서 찾을 수 있다. 솔로몬의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자연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신랑은 ‘아가서’ 4장 12~14절에서 사랑하는 신부를 정원으로 노래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문 잠긴 동산, 덮어놓은 우물, 막아 버린 샘이다. 그대의 동산에서는 석류와 온갖 맛있는 과일, 고벨 꽃과 나도 풀이다. 나도 풀과 번홍꽃, 창포와 계수나무 같은 온갖 향나무, 몰약과 침향 같은 온갖 귀한 향료가 나는구나!”
카라바조의 그림은 ‘아가서’에 등장하는 과일의 묘사와 흡사하다. ‘아가서’에서 묘사한 과실들이 소년의 바구니에 담겨 있다. 소년은 신랑으로, ‘아가서’에 등장하는 구절을 신부에게 노래하고 있다. 16세기 로마 교회는 ‘아가서’에 등장하는 남녀 간의 노골적인 사랑을 어떻게 은유적으로 해석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아가서’ 4장 12절에 등장하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문 잠긴 동산, 덮어놓은 우물, 막아 버린 샘’이란 구절에서 가톨릭 신앙의 상징인 성모 마리아를 발견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문 잠긴 동산’을 성모 마리아의 동정을 의미하는 구절로 해석하였다. 이 그림은 신랑인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1573년 ‘아가서’에 대한 주석서를 쓰면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이해하는 신자가 많지 않다고 언급하였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 가톨릭 신학자들도 성공하지 못한 성서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좁은 경계 위를 걸으면서, 당시 가톨릭교회 그림을 통해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 그림은 이러한 영적인 해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적이며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아가서’에 대한 남녀 간 사랑을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사랑으로 승화하려 해석하려는 사람에게 이 그림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년의 드러난 어깨는 자신의 신적인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상징이며 동시에 자신이 모든 인류를 위해 그 사랑의 표현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겠다는 결심의 상징이다. 영생이란 바구니에 숨어 있는 죽음으로부터 건져낸 소중한 선물이다. 말라비틀어지고 벌레가 먹은 이파리가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함께 바구니에 담겨 있다. 힘을 잃고 떨어지는 이파리는 자상에 있는 만물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진리를 묵묵히 말하고 있다. 포도는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흘린 희생의 피인 성만찬의 포도주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죽음을 원합니까 아니면 생명을 원합니까? 어둠을 원합니까 아니면 빛을 원합니까? 생명은 죽음의 선물이고 빛은 어둠의 자식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배철현 더코라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0호 (2025.05.21~2025.05.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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