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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 사이, 우리는 누구인가 [배철현의 ‘카라바조로 보는 인생’]

“당신은 자신의 열정을 표현합니까?”

  • 배철현 더코라 대표
  • 기사입력:2025.05.01 12:28:40
  • 최종수정:2025.05.01 12: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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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의 열정을 표현합니까?”
‘아픈 바쿠스 신’, 카라바조(1571~1610년), 유화, 1593~1594년, 67×53㎝,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아픈 바쿠스 신’, 카라바조(1571~1610년), 유화, 1593~1594년, 67×53㎝,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말이나 숫자로는 표현할 수 있는 감각과, 감각이 만들어내는 통찰력과 상상력이 있다. 과학과 철학은 심오한 통찰력에 관한 부족한 문장이고 무한한 상상력에 대한 잠정적인 표현이다. 현대에 들어와 숫자와 말을 이용하는 과학과 철학이 숫자와 말을 초월한 통찰력과 상상력의 자리를 차지하여 모든 것을 숫자와 통계와 수치로 전락시키고 있다.

인간은 기계인가? 아니 전지전능한 기계인 AI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탁을 받는 노예인가? 인터넷과 그의 총아인 AI 등장으로 인류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지켜왔던 가치와,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루어온 문화와 문명의 근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류는 숫자와 통계가 아니라 신뢰, 정의, 공정을 기반으로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사회를 구축했다. 또 배려, 자비, 사랑이라는 가치를 그 구성원에게 고취하여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문화를 향유해왔다. 친구와의 우정,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만큼 인간에게 ‘진짜’인 것이 있는가? 과학이란 가면을 쓴 기술은 우정, 사랑, 희생을 뇌에서 발견되는 특정 부위의 작동쯤으로 폄하한다.

선각자들은 오래전부터 인간은 이성과 감성, 논리와 직관, 관찰과 상상력이라는 두 날개로 인류의 문화를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해왔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신인 제우스에게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아들이 있다. 아폴로신과 디오니소스신(로마시대 바쿠스)이다. 아폴로는 이성적인 사고와 질서의 신이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와인의 신이다.

포도가 오크통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내면, 포도주란 기적이 일어난다. 고대 그리스인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고유한 자신을 회복하는 의례를 거행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아폴로신과 디오니소스신은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란 책에서 이성과 질서의 세계와 열정과 혼돈의 세계는 인류 문화를 뫼비우스 띠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작동시켜왔다고 말한다.

카라바조가 고향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정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린 초기 작품이 있다. 디오니소스의 정신과 반역이 스며 있다.

그는 당시 르네상스 천재 화가들의 신과 인간의 뚜렷한 구분을 강조하고 원근법을 강조하는 아폴로식 그림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 카발리에 다르피노(Cavaliere d’Arpino)로 알려진 주세페 체사리의 작업실에서 혁명적인 그림 두 점을 그렸다.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아픈 바쿠스 신’이다. 특히 그는 ‘아픈 바쿠스 신’에서 자신이 해석한 인생과 예술의 철학을 바쿠스신을 통해 표현했다.

이 두 점은 카발리에 다르피노 작업장에 보관되었다. 다르피노는 이후 두 작품을 채무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교황 바오로 5세에게 넘겼다. 교황은 이 그림들은 자신의 조카이자 추기경인 스키피오네 카파렐리-보르게세에게 희사했고, 현재 로마에 있는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카라바조는 로마에 정착하면서 큰 사고를 당한다. 말을 타다 떨어져 말의 발에 차여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로마 빈민을 위한 병원인 ‘콘솔라치오네(Consolazione)’ 병원에 입원했다. 요양 중 그는 자화상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자신을 바쿠스신으로 그렸다. 그림에서 바쿠스는 로마 시대 수염이 달린 근엄한 신이 아니다. 16세기 로마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수염이 없는 젊고 병든 신, 방탕한 자신의 모습이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푸르다. 와인과 방탕의 신인 바쿠스가 오른손으로 싱싱한 연두색 포도가 아니라 색이 바랜 흰색으로 변한 포도송이를 들고 있다. 동시에 검은 배경색 때문에 잘 보이진 않는 왼손으로는 포도알을 쥐어짜고 있다. 포도알은 먼지로 덮여 흰색이 되었고 빛을 온전히 받는 오른쪽 어깨와 대조를 이룬다. 포도송이와 어깨 사이에 위치한 바쿠스의 얼굴은 황달기가 있어 창백하고, 그의 검푸른 입술은 그가 심한 병에 걸렸거나 그 전날 과음에서 아직 헤매고 있다는 증거다.

‘바쿠스와 아드리아네’, 티치아노(1490~1576년), 유화, 1523년, 176.5×191㎝, 영국 국립 미술관.
‘바쿠스와 아드리아네’, 티치아노(1490~1576년), 유화, 1523년, 176.5×191㎝, 영국 국립 미술관.

이성과 감성·논리와 직관·관찰과 상상력

이 두 날개가 적절히 조화로워야~

바쿠스가 팔꿈치를 디디고 있는 식탁 끝에는 방금 나무에서 따온 과일이 놓여 있다. 아직 보송보송한 털을 간직하고 있는 복숭아와 자주색 포도송이가 차디찬 식탁에 위험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는 당시 화가들이 많이 사용한 볼록렌즈 거울을 통해 보고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은 자신을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는 친밀감과, 그 친밀함이 야기하는 당황스러움을 동시해 표현하고 있다. 그의 깊은 눈은 이 친밀함과 당황스러움을 하나로 잡아준다. 반쯤 어둠에 잠겨 있는 그의 오른 다리는 이제 막 일어날 참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자기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왜 카라바조는 자신을 이렇게 그렸을까? 자신이 중병에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그림의 배경은 바쿠스신의 술 파티가 일어나는 저녁이다. 바쿠스의 어깨를 비추고 얼굴을 연두색으로 만든 빛은 태양빛이 아니라 달빛이다. 화가는 자신을 바쿠스신으로 표현했다. 달처럼 변화무쌍한 자신이다. 동시에 바쿠스는 신적인 영감의 상징이다. 그는 혼돈, 무정부, 통제가 되지 않는 직감으로 넘쳐난다. 그는 질서와 문명의 상징인 아폴로신과 대척점에 있다. 하루가 빛과 어둠으로 구성되어 있고 태양과 달이 각각을 관장한다.

카라바조는 분명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는 티치아노의 ‘바쿠스와 아드리아네’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연인 아드리아네를 낙소스섬에 남겨두고 배를 타고 떠났다. 그때 바쿠스가 도착했다. 그는 아드리아네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치타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하늘로 올려줄 참이다. 바쿠스를 따라온 황홀경에 빠진 실레누스와 젊은 반인반수신 사 튀로스가 춤을 추고 있다.

카라바조는 바쿠스 신화에 관련된 이 모든 인물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배경에 매장시켰다. 이들의 폭력과 혼돈은 바쿠스의 미묘한 미소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카라바조는 ‘아픈 바쿠스’ 그림을 통해 원근법과 기하학을 기반한 르네상스 문화에 감성적이며 즉흥적인 문화가 덧붙여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사진설명

[배철현 더코라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8호 (2025.05.07~2025.05.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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