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 트럼프는 "전쟁 양측 중 한쪽이 협상을 어렵게 한다면 우리는 손 떼겠다"고 했다. 폭격을 멈추지 않는 러시아에 화가 난 그는 추가 제재를 위협하는 등 우왕좌왕이다. 반면 유럽은 미국이 전쟁에서 빠지더라도 다음 타깃은 자기들이라는 위기감에 어떻게든 버텨볼 심산이라 종전은 멀어 보인다. 이럴 경우 우리가 기대했던 '종전 후 북·러 밀착 와해' 시나리오는 요원해진다.
크렘린궁은 지난 26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그동안 북한군 참전 주장과 증거 영상에도 가짜 정보라고 우겼던 러시아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의 기습으로 빼앗겼던 쿠르스크 지역을 북한군 투입으로 수복에 성공하자 그 성과와 공로를 북한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북한도 하루 만에 파병 사실을 공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27일 "국가수반 명령에 따라 참전해 쿠르스크 해방 작전이 승리로 종결됐다"고 했다. 북·러 모두 지난해 6월 체결한 동맹조약 규정에 따른 합법적 파병임을 강조했다.
시차를 둔 북·러 발표에 이들의 손발이 착착 맞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쟁이 가져온 북·러 밀착이 우리 기대를 계속 벗어나 정점을 높여가고 있다. 최근 육해공에서 북한의 잇단 무기체계 과시에 대해 전문가들이 러시아의 기술 이전 가능성을 말하는데도 정부는 별 반응이 없다. 대북 기술 지원을 삼가라며 러시아를 향해 "레드라인을 넘지 말라"는 호기 있는 경고도 사라졌다. 물론 레드라인을 넘더라도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은 러시아를 자극해 북·러 밀착만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항 옵션이 되긴 애초 불가능했다.
이렇듯 속수무책이다 보니 이젠 트럼프가 전쟁을 빨리 끝내주기만 기다리는 듯하다. 종전이 되면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팽(烹)당하고, 한·러 관계는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가를 부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북·러 관계는 전쟁을 계기로 조약 문구 차원을 넘어 실전을 통해 혈맹 수준이 됐다. 전장에서 피를 함께 흘린 북한과 종전 후 척을 진다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상이용사를 친인척으로 둔 다수의 러시아인들이 공감하기 힘든 일이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북한군은 쿠르스크에서 우리 군과 한 참호에서 어깨를 맞대고 피 흘려 싸우며 영토 해방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할 정도다.
한국국방연구원에 따르면 북한 역시 병력·무기 지원으로 28조7000억원 상당의 경제 효과를 얻었다. 둘 다 협력의 이익이 뚜렷한데 북·러 관계가 전쟁 전으로 회귀할 것이란 기대는 버리는 게 낫다. 신범식 서울대 교수는 북·러가 전시(戰時) 공조를 넘어 구조화된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진입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러시아는 대북 협력을 동북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조정하고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지정학적 자산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의 북한 손절은 중국 견제를 목표로 미·러가 협력한다는 '역(逆)키신저' 구상만큼이나 현실성이 낮다.
트럼프의 종전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고조되는 북·러 밀착과 그 여파에 대해 우리만의 판단과 대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종전을 언제든 포기해버릴지 모를 트럼프의 입만 보고 있을 일이 아니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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