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시원 풍경은 익숙했다. 20대 시절 자취하며 살던 원룸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처음 고시원 문을 열었을 땐 추억여행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낭만은 첫날 밤부터 깨졌다. 방음 기능이 사실상 없었다. 옆방 사람의 기침 소리, 키보드 타자 소리, 라면 먹는 소리까지 벽을 넘었다. 밤은 길고 잠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이템 두 개를 준비했다. 다이소에서 귀마개를 사고, 서점에 들러 10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골랐다. 침대 위에서 귀마개를 착용하고 활자를 쫓다 보면 벽돌 책이 눈꺼풀을 눌러줄 것 같았다. 그렇게 폴 오스터의 '4321'이라는 책과 함께 고시원의 한 달이 시작됐다.
대학생 시절 오스터 소설을 즐겨 읽었다. 자취방 책장엔 그의 책이 줄줄이 꽂혀 있었다. 4321은 오스터 문학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오스터 문학의 핵심 키워드는 '우연'이다. 4321은 대놓고 우연을 다룬다. 주인공 이름은 아치 퍼거슨. 이 책은 퍼거슨의 삶을 4개의 평행우주로 쪼개 묘사한다. 어떤 세계에서 퍼거슨의 아버지는 화재로 일찍 사망하지만, 또 다른 세계에서 아버지는 요절하지 않고 번듯하게 살아간다. 어떤 세계에서 퍼거슨은 작가가 되며, 또 다른 세계에서 그는 여름 캠프에 참여했다가 벼락을 맞은 나무에 깔려 죽는다. 이 책은 한 인물에게 가능했던 삶을 여러 갈래로 펼쳐놓는다. 그러면서 인생은 결국 무작위적 사건들이 교차하는 지도 위의 특정 좌표일 뿐이라고 말한다.
고시원에서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내 삶을 돌아봤다.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다양한 이벤트가 있었다. 혹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폐기된 이벤트도 많았을 것이다. '그때 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런 가정은 누구에게나 최소 수십 개는 있을 것이다.
숙면 효과는 좋았다. 귀마개를 착용하고 책을 읽다 보니 20페이지도 못 읽고 까무룩 잠들기 일쑤였다. 결국 고시원에서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리모델링이 끝난 집으로 돌아온 후 남은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은 느리게 읽고 싶었다.
연초에 펼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건 4월 중순이었다. 며칠 뒤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오스터가 폐암 합병증으로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기분이 묘했다. 왜 하필 오스터는 내가 그의 책을 막 덮은 시점에 떠났을까. 물론, 이유는 없다. 이 또한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필연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은 드물다. 한 인간의 탄생조차 수많은 우연이 겹쳐 이뤄진 결과다. 그런 관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새삼 신비스럽다. 수없이 갈라지는 평행우주의 복잡한 궤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같은 좌표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조성준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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