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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탕한 왕비 덕분에 총리에 오른 ‘고도이’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33) 정치 대신 치정이 군림한 스페인

  •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 기사입력:2025.02.22 21:00:00
  • 최종수정:2025-02-21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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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정치 대신 치정이 군림한 스페인

스페인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 벗은 마하(La maja desnuda)’일 것이다. 화가를 유혹하는 듯한 당당한 표정, 세밀하게 묘사된 음모까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을 그린 누드화다. 지금이야 명화로 꼽히지만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당시 보수적 스페인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그림이었다.

물론 고야 이전 화가들도 누드를 그렸다. 그러나 그들은 ‘알리바이’가 있었다. 신화에서 주제를 빌리는 식이었다. 현실이 아닌 신들의 세계를 소재 삼아 법적·도덕적 논란을 피해가려던 계산이었다. 고야는 그러지 않았다. 실존하는 스페인 여성을 사실주의로 그려냈다. 스페인 종교 재판소가 고야를 법정에 세운 이유다.

논란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행동한 배경이 있었다. 그림을 주문한 이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살아 있는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마누엘 고도이. 공식적으로 스페인 총리였지만 시민들은 그를 다른 눈으로 바라봤다. 왕비의 섹스 파트너. 사실상 스페인의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이뤄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스페인의 국정 동력은 ‘정치’가 아니라 ‘치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의 끝은 대개 뻔하다. 파국. 스페인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옷 벗은 마하’.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당시 보수적 스페인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누드화였지만, 권력자였던 마누엘 고도이는 아랑곳없이 그림을 주문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옷 벗은 마하’.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당시 보수적 스페인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누드화였지만, 권력자였던 마누엘 고도이는 아랑곳없이 그림을 주문했다.

늙은 왕세자비 사로잡은 젊은 군인

우둔한 군주, 불륜남을 총리로 임명하다

마누엘 고도이는 지방 귀족 아들이었다. 주변부에서의 삶은 권력을 향한 욕망을 키웠다. 부모도 고도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다 했다. 철학·수학·인문학 지식을 고양하고, 승마와 펜싱으로 신체를 단련시켰다. 수도 마드리드의 잘나가는 귀족 자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회가 찾아왔다. 1783년 국왕 카를로스 3세의 경호부대를 뽑는 공고가 올라왔다. 고도이가 야망을 실현할 찬스였다. 왕의 지근거리에서 수행한다는 건 지방 귀족에게 엄청난 성취였다. 준비된 인재 고도이는 형과 함께 자리를 꿰찼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마드리드 왕궁에 입성했다.

잘생기고 다부진 고도이를 유심히 쳐다보는 여인이 있었다. 추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누가 봐도 왕족의 기운을 풍기는 여자. 왕세자 카를로스 4세의 아내 마리아 루이사였다. 나이는 고작 39살이었지만 외모는 노인에 가까웠다. 23번의 임신과 10번의 유산으로 몸이 망가진 탓이다. 이가 다 빠져버린 탓에 입술을 늘 말고 다녀야 했다.

신체적인 결함에도, 그녀의 욕망은 늘 끓어올랐다. 스페인 정치에 언제나 개입하고 싶어 했고, 밤에는 불타는 욕정을 채우려 했다. 타고난 소인배였던 남편 카를로스 4세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이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젊고 섹시한 고도이를 보고 군침을 삼켰다. 그가 왕세자빈 침실로 들어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를로스 4세가 취미인 사냥에 나갈 때마다, 그녀는 고도이라는 젊은 군인을 사냥했다. 두 사람의 방에서 흘러나온 교성을 스페인 모든 사람이 들었지만 카를로스 4세만은 예외였다. 왕세자빈의 체온이 올라갈수록, 고도이의 계급도 덩달아 올라갔다. 1784년 왕세자 카를로스 4세가 왕위에 올랐다. 고도이의 애인 마리아 루이사가 왕비가 됐다는 의미였다. 마누엘 고도이는 총리 자리에 오르고야 만다.

프랑스 전쟁에서 ‘패전’했지만

가톨릭 무시하고 정부 ‘누드화’ 주문

스페인은 도전받고 있었다.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 자유의 정신은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이웃 나라에도 점점 퍼져가고 있었다. 고도이가 시험대에 올랐다. 그가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그의 자질과 능력이 아니라 음탕한 왕비 덕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전임 총리 호세 모니노는 두 사람이 불륜 관계에 있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총리의 자리에 오른 지 이듬해 프랑스 민중은 루이 16세의 목을 잘라버렸다. 유럽의 전 군주는 경악했다. 신이 내리신 왕의 목숨을 천한 민중들이 자르다니.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스페인은 다급했다. 결국 선전 포고를 결정한다. ‘피레네 전쟁’이다. 고도이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전쟁 지휘 능력은 모자랐다. 왕비 침실에서만 맹장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군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과 카탈루냐 지역을 점령했다. 굴욕적으로 손을 먼저 건넬 수밖에 없었다. 바스크와 카탈루냐를 돌려받는 대신 식민지인 산토도밍고섬(현 도미니카공화국 동부)을 프랑스에 넘겨야 했다. 1795년 ‘바젤 협약’이다.

패장 고도이를 카를로스 4세가 불렀다. 비판과 문책이 이어지리란 예상은 빗나갔다. 왕은 그에게 ‘평화의 왕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고도이는 무슨 짓을 해도 왕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셈이다.

왕가를 방패로 삼은 고도이는 호색한 삶을 즐겼다. 귀족과 결혼하고서도 여러 애인을 두면서 문란한 삶을 이어갔다. 왕실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를 불러 자신의 정부 호세파 데 투도의 나체화를 그리게 했다. ‘옷 벗은 마하’의 탄생이다. 보수적인 가톨릭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페인의 지배자는 왕도 왕비도, 왕세자도 아닌, 고도이 그 자신이었으니까.

고도이는 무적의 사나이였다. 왕과 왕비가 그를 철저히 옹호하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그때 카를로스 4세의 아들이자 왕세자 페르디난트 7세가 고도이와 척을 세웠다. 혼란한 국정 운영의 책임을 물어서다.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그런 아들을 질책했다. 스페인의 충신을 몰라본다며.

스페인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애인으로 총리 자리까지 오른 마누엘 고도이 초상화.
스페인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애인으로 총리 자리까지 오른 마누엘 고도이 초상화.

프랑스 꼭두각시 된 마누엘 고도이

나폴레옹 명령 철저히 따르다 망명

이웃 프랑스는 ‘고도이 체제’를 열렬히 환영했다. 국경을 맞댄 국가의 눈물은 자국엔 단비와 같았다. 프랑스 혁명 정신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페르디난트 7세보다는 꼭두각시 고도이의 체제를 선호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을 우군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고도이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철저히 따랐다. 프랑스가 영국과 동맹관계인 포르투갈을 공격할 것을 주문하자, 스페인 군대는 전쟁을 일으켰다. ‘오렌지 전쟁’이다. 고도이는 나폴레옹이 포르투갈 영토 일부를 자신에게 내줄 것이라 믿었다.

영원한 우군은 없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스페인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카를로스 4세, 마리아 루이사를 프랑스 도시 바욘으로 불렀다. 왕위 이양을 강요하기 위해서다. 카를로스 4세도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7세도 나폴레옹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동생 조제프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했다. 민중들은 “고도이가 스페인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베리아반도에 고도이는 없었다. 그는 이미 망명길을 떠난 뒤였다. 마리아 루이사도 죽을 때까지 스페인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죽은 뒤에서야 그들의 유해가 스페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정치가 사라지고, 치정만 가득한 시대가 부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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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7호 (2025.02.19~2025.02.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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