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16 06:00:00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 좋아하시나요? 만화에서 태어난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가 영화로 실제처럼 다가오며, 코믹스를 몰랐던 많은 이들도 마블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비로운 존재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속에, 어느 순간 그 속에 우리가 함께 있는 듯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이 열풍은 2019년 ‘어벤저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이 끝난 후, 시들어버렸습니다. 후속 영화들은 대거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정당성)에 매몰되며, 스토리도 액션도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이제 영화는 팬들의 애정과 성원도 ‘디 엔드(the end)’가 돼버린 듯한 모습이지만, 코믹스는 여전히 ‘경이로운(驚異: 놀랄 경, 이상할 이. marvel)’ 이야기를 선물해 줍니다.
마블 캐릭터들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시나요? 수천 명 히어로와 빌런들이 즐비한 마블 유니버스에서, ‘찐팬’들의 최고 인기 캐릭터는 ‘짐 로건’, 바로 ‘울버린’이라고 합니다. 엄청나게 까칠한 성격에, 호전성(好戰性: 좋아할 호, 싸움 전, 성질 성. combativity)과 괴력이 특징입니다. 특히 자체 치료물질인 ‘힐링 팩터(healing factor)’가 무한정 분비되어, 다쳐도 금세 회복하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사신(不死身: 아닐 불, 죽을 사, 몸 신. immortal)’입니다.
손등에서는 뼈로 구성된 발톱(claw)이 솟아나는데, 군대는 개조실험을 통해 이 발톱을 ‘아다만티움(adamantium)’이라는 상상의 금속으로 갈아치웠습니다. 아다만티움은 그리스어 ‘아다마스(adamas)’에서 왔는데, ‘부술 수 없는’, ‘가장 단단한’이란 뜻을 가졌습니다. 고가 보석의 대명사 ‘다이아몬드(diamond)’도 이 ‘아다마스(adamas)’에서 유래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우리민족의 ‘영산(靈山: 신령 령, 뫼 산)’인 ‘금강산(金剛山’: 쇠 금, 굳셀 강, 뫼 산)’의 ‘금강(金剛)’도, 금강석(金剛石) ‘다이아몬드’와 인연이 있습니다. 금강산은 생명이 움트는 봄의 모습이 금강석처럼 아름다워 붙은 이름이라네요. 한자풀이로는 그저 단단한 금강석이지만, 본래 의미는 찬란히 빛나는 ‘고귀한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울버린(wolverine)’이라는 이름의 뜻도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울버린(wolverine)은 북미에 사는 오소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늑대인간(werewolf)’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늑대 ‘wolf’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멘(X-Men)’의 영향이 큽니다. 원래 160cm에 130kg이나 나가는 땅딸보 오소리를, 188cm에 78kg인 늘씬 미남 휴 잭먼이 연기했습니다. 캐릭터는 오소리처럼 강인하고 야성적이긴 하지만 허우대는 훤칠하고 미끈하니, 우두머리 늑대가 생각날 수밖에 없습니다. 북미오소리 울버린도 늑대처럼 거칠고 강인합니다. 실제로 ‘울버린’이란 말은 늑대 ‘울프(wolf)’에서 왔습니다. 인터넷 어원사전 ‘etymonline’은, 울버린이 ‘늑대처럼 사나운 동물/늑대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뜻했을 거라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울버린의 우리말 ‘오소리’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오솔길로 다니는 짐승’이란 유래설이 가장 보편적인데요. 오솔길은 ‘외솔길’에서 변화한 말입니다. ‘외’는 ‘외나무다리’나 ‘외아들’처럼 ‘동떨어진 하나’를 뜻하고, ‘솔’은 ‘가늘고 좁다’란 뜻을 가졌습니다. 송곳이나 소나무(솔나무)도 같은 뿌리를 가졌다고 추정됩니다. 호랑이나 멧돼지 같은 떡대 큰 짐승들이 다니기 힘든 좁고 호젓한 길. 이 ‘오솔길의 주인’ 오소리는, 겁 없이 이 좁은 세상을 호령(號令: 부르짖을 호, 명령할 령. command/order)’하며 살았습니다. 실제로 캐나다의 야생 다큐멘터리에서, 겁 없이 늑대무리에 맞서다가 물려 죽은 울버린의 사체를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울버린은 아저씨들이 가장 사랑하는 히어로입니다. 울버린이 등장하는 마지막 영화 ‘로건(Logan)’에서, 울버린은 아다만티움 중독으로 더 이상 자가치유가 어려워져 늙고 병들어 갑니다. 우연히 자신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처음 만난 딸을 위해 목숨을 던집니다. 그 이야기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에 대한 연민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는 오소리 같은 분이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집안 11남매의 장남은, 돈을 벌기 위해 아주 어린 나이에 객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타향살이는 배고프고 외로웠습니다. 약삭빠른 어른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하고, 모진 이들과 맞서며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결국 더 거칠고 사납게 맞서는 게 생존의 지혜란 신념이, 굳은살처럼 몸과 마음에 박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투박한 생존방식으로 자식들도 훈육했습니다. 아들들이 다른 아이들과 다투다가 얼굴에 상처라도 나서 집에 오면, 더 혹독하게 혼을 내셨습니다. 왜 다퉜고, 어떻게 화해했는지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맞고 오면 안 됐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살갑게 보듬지 못한 대신, 먼발치에서 바라보셨습니다. 시골 중학교를 1등으로 들어갔을 때,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을 때조차, 아버지는 웃음짓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셨다더군요.
“그렇게 공부 잘한다면서? 아버지가 네 얘기 나오면 가끔 한턱내신다.”
“그러시지 말라고 하세요, 그저 그래요.”
세월이 지나, 내가 아버지를 떠날 때만큼 내 아들이 나이들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어렵습니다. 그 머쓱함이 싫어 내 아들과는 살갑게 지내려고 애쓰지만, 어쩌면 나도 머쓱한 아버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나니,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치열하게 맞섰던 내 아버지의 그 시절 모습이 기억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서운한 마음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오소리의 삶을 살아왔나 봅니다. 작지만 너무나 소중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좁다란 오솔길 위에서 거칠고 투박해야 했던, 살갑지 못해 외로운….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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