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종교까지 번진 경계허물기 차별·폭력 해결책 되기 힘들어 오히려 도덕의 상실 불러와 인류 지속성에 악영향 줄 것
음악은 귀로 듣고, 그림은 눈으로 본다. 반면 천재들은 음악을 보고, 그림을 듣는다.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에게 음악과 그림은 하나였다. 그는 평소 피아노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보다, 머릿속으로 음표와 리듬을 그리는 것을 즐겼다. 노벨물리학상을 탄 리처드 파인먼은 문자와 컬러, 수학의 뒤섞임을 자주 경험했다. 그는 "방정식을 볼 때면 글자에서 색을 느낀다. 그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이처럼 창조적 천재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은 공감각적 사고다. 철학자 스티브 오딘은 일본 다도(茶道)를 처음 접한 후 "감각들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색, 소리, 맛, 향, 감촉, 온도 등 모든 감각이 섞이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천재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경계 허물기가 이젠 일상의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다. 일상에서 경계 허물기는 필연적으로 고정관념을 깬다. '바지 위 치마' '미니스커트에 넥타이' 등 고정관념을 넘어선 패션이 유행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고정관념 타파와 가치의 파괴를 혼동하면 안 된다. 고정관념을 깬 음악과 패션은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과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때때로 그것은 문명의 발전을 이끄는 동력을 제공한다.
반면 가치 파괴는 인류의 지속성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는 최근 들어 극단적 경계 허물기가 가치 파괴로 이어지는 상황을 자주 목격한다. 예컨대 필자에게 '남녀 간 (생물학적) 경계 허물기'는 비상식적이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권리에 불평등이 있어선 안 된다.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에도 반대한다. 전근대적 가부장 문화 역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이나 트랜스페미니즘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사회는 '가족'이다. '남녀 간 경계 허물기'는 가족에 대한 가치관을 깨뜨리는 것을 넘어 가족 해체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가족 해체는 사회, 더 나아가 주권국가의 존립에 결정적 위협으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젠더 이데올로기는 또 다른 경계 허물기의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다. 다름 아닌 영토 허물기다. 지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귀환으로 잠시 멈췄지만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는 사람들의 숙원과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경계 허물기'가 있다. '종교 통합(혼합)' 운동이다.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이른바 '종교 다원주의'가 최근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달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그 어느 교황보다 종교 다원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는 지난해 9월 싱가포르 '가톨릭 주니어 칼리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모든 종교는 신에게 도달하는 길이다. 종교는 신에게 닿기 위한 서로 다른 언어와 같다"고 말했다.
가톨릭에 종교 다원주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해준 사람은 신학자 카를 라너다.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론'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니며, 이 땅에는 여러 그리스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개신교 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도 가톨릭·불교·힌두교·이슬람 등 타 종교와 일치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종교 갈등에서 비롯된 각종 분쟁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인류 평화를 추구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 간 대화는 '정치·외교적 노력' 이상이 돼선 곤란하다.
대화 차원을 넘은 종교 혼합은 인류의 도덕관념에 큰 혼돈을 야기할 것이다. 타협해선 안 될 '절대진리'를 무력화하고 특정 종교의 존립에 위협을 가할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