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 의장, “우리도 경험 없는 상황”
‘물가·고용’ 이중책무선 물가에 무게
트럼프 압박 ‘금리인하’ 버티기 유력

트럼프 관세 전쟁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을 ‘미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물가와 최대고용이라는 이중 책무를 진 연준이 작금의 경제 상황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재정·통화 정책을 구사할지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16일 시장에 솔직히 토로하면서 가뜩이나 연준으로부터 위안을 원했던 뉴욕 증시는 파월의 햄릿 같은 모습에 낙폭을 더 키웠습니다.
그의 발언을 곱씹기 전에 미 연준의 독특한 이중 책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통상 물가 관리를 단일 목표로 하는 다른 중앙은행과 달리 연준은 독특한 임무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물가 관리와 더불어 최대고용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죠.
이 정책 부담은 미국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한 1970년대에 부과됐습니다. 고물가와 고실업률이 동시에 발생했던 상황에서 미 의회는 연준법을 개정해 중앙은행의 목표를 ‘최대 고용, 안정적인 물가, 완만한 장기 금리’로 적시했습니다. 여기에서 안정적 물가와 완만한 장기 금리를 물가로 묶어 최대고용과 함께 ‘이중 책무’가 완성됩니다.
제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2003년부터 지금까지 지난 22년간 미국 경제를 돌이켜보면 연준이 이 이중 책무에서 햄릿과 같은 고민에 빠지는 딜레마 상황은 크게 없었습니다.
예컨대 세계 경제를 직격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 국면에서 연준은 기준금리를 제로(0)에 가깝게 낮춰 경기 방어(최대고용)에 집중했습니다.
이후 현대 사회가 경험하지 못한 전염병발 경제 쇼크인 2020년 팬데믹 때도 모든 경제 활동이 멈춤(stand still)에 처하자 2008년처럼 빠르게 금리를 낮춰 일자리 방어에 나섰습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가중되던 2021년부터 이듬해까지 물가가 치솟자 연준은 2022년 425베이스포인트(bp, 1bp=0.01%), 이듬해 100bp까지 끌어올리며 불기둥처럼 타오르는 인플레이션 관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상대로 145%의 상호관세 등 세계 각국을 상대로 상상을 넘어서는 관세 전쟁을 벌이고 있는 트럼프 경제 정책은 연준의 상상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관세율 인상이 가져올 당연한 물가 상승 압박과 함께 경기 침체를 일으켜 실업률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월 의장은 이날 연설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예상보다 높은 관세로 인해 물가 인상과 성장 둔화가 예상된다면서 “아마 올해 내내 우리를 목표 달성에서 더 멀어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 관세 전쟁으로 말미암아 주가 폭락이라는 봉변을 당한 시장은 그의 입에서 긍정적 메시지를 듣고 싶었는데 오히려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식의 푸념이 돌아온 것이죠.
그는 기준금리 인하 등 통화정책 조정을 당장은 고려하지 않고 상황을 더 지켜보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며 “우리는 양대 목표(물가와 최대고용)가 긴장 상태에 놓이는 도전적인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이처럼 파월 의장의 입에서 이른바 ‘페드 풋’ 효과를 기다린 시장은 절망감을 표출했고 기술주 위주의 나스닥지수는 3.07%까지 떨어졌습니다. 페드 풋은 불안한 증시 상황에서 연준 의장이 구두로 시장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일으키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투자자에게 풋옵션을 주는 것처럼 시장을 낙관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렇다면 연준은 물가가 고개를 들고 경기 침체로 실업률까지 상승하는 딜레마적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재닛 옐런 등 과거 의장들의 발언을 추려 보면 연준의 우선순위는 물가보다 일자리에 가까워 보입니다. 소위 인도적 접근으로, 일자리 제공이 우선돼야 국민이 고물가에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연준의 비공식 대변인으로 불리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닉 티미라오스 기자는 이날 파월 의장 발언 관련 기사에서 이중 책무가 충돌할 경우 파월 의장은 일자리보다 물가에 우선순위를 둘 것임을 암시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파월 의장이 “물가 안정 없이는 모든 미국인에게 이익이 되는 장기적인 강력한 노동 시장 상황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 목표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발언한 대목에서 그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
티미라오스 기자의 분석으로 보면 파월 의장은 미 실업률에 심각한 위기 징후가 나오기 전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갈구하는 기준금리 인하를 최대한 미루며 물가 관리에 치중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불확실성은 면밀한 주시가 필요하지만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흔들릴지 걱정할 단계는 아닌 것으로 해석됩니다.
관련해서 작년 11월 메리 데일리 샌프란시스코 연방은행 총재는 미국 경제가 확장과 수축의 경기 사이클로 보면 확장의 ‘초입’ 국면에 있다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 경제는 젊고 강한 컨디션이라는 뜻이자, 연준이 가장 원하는 경기 흐름입니다.
데일리 총재는 연준이 이 젊은 국면이 빨리 수축 국면으로 전환되지 않고 최대한 길게 유지되도록 여건 조성에 힘쓰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앞서 작년 8월 파월 의장은 잭슨홀 미팅에서 “우리는 책임을 수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우리의 행동은 물가 안정 회복을 위한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줬다”며 연준이 인플레이션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습니다. 기준금리를 내리겠다는 통화정책 전환(pivot) 선포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등장으로 불과 8개월만에 연준과 시장은 거대한 불확실성에 포획됐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연준에는) 현대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 경제 상황에 대한 16일 파월 의장의 고해성사는 트럼프 관세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경제적 자해 행위인지를 확인하는 또 하나의 무력한 증거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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