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37세의 LPGA투어 17년 차 이일희가 보여준 투지와 골프를 대하는 자세,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근성, 승자인 제니퍼 컵초(미국)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겼다.
경기를 마친 이일희의 표정에 우승을 놓친 아쉬움은 없었다. 그는 "선두로 최종 라운드를 나선 것은 처음이라 긴장했다. 초반에는 좀 안 좋았지만 4번홀부터 괜찮아졌고 끝까지 좋은 마무리를 했다"고 환한 미소와 함께 소감을 밝혔다. 우승은 놓쳤지만 2014년 미즈노 클래식 공동 2위 이후 9년 만에 최고 성적을 거뒀고, 상금 16만4136달러(약 2억2000만원)를 챙겨 기쁨이 배가됐다.
이일희는 한국이 LPGA투어를 지배하던 2세대 멤버다. 2013년에 한 차례 우승한 뒤 2015년에는 공동 3위 등 8차례나 톱10에 오르며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어깨 부상으로 2018년에는 결국 시드를 잃고 말았다. 잊힌 듯했던 이일희의 이름이 다시 알려진 것은 앞서 열린 US여자오픈이었다. '바늘구멍'과 같은 예선을 통과해 다시 필드로 돌아왔고, 이번주에는 자신의 200번째 대회에서 우승 경쟁을 펼치며 주목받았다.
오랜만에 필드에서 우승 경쟁을 펼친 이일희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여유가 넘쳤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동반자인 컵초에게 진심으로 응원을 하는 등 여유가 넘쳤다. '골프'에 대해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았고, 골프를 즐기고 있다"고 말한 이일희는 사실 시드를 잃은 이후 잠시 골프계를 떠나기도 했다.
이일희는 가장 먼저 1년을 다녔던 학교로 돌아가 4~5년간 공부하며 지난해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뿐만 아니다. 이일희는 "공부를 하며 돈도 벌어야 했다. 금융회사에서 100일 정도 일했는데, 좋은 경험이었지만 즐기지는 못했다"고 돌아봤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다. '아, 내가 골프를 잘하는구나'란 것이었다. 이일희는 "풀타임 코치는 아니지만 레슨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사랑하는 일이다. 다친 어깨와 등, 발목 치료도 꾸준히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일희는 어엿한 '대표님'이기도 하다. 이번 대회에서 이일희가 쓰고 나온 모자 정면에는 'Supar'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로스앤젤레스(LA) 코리아타운에 공동 설립한 실내 골프장이다. 이일희는 "내 골프장을 짓고 있다. LPGA투어 15년 차이지만 부상으로 인해 골프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한 뒤 "요즘 실내 골프가 인기가 많고, 거기서 연습도 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앞서 이일희는 일명 '엉뚱한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관심사가 다양하고 열정이 넘쳤기 때문이다. 사진 실력이 뛰어나고 드럼 연주, 프로 백패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 전성기 시절 아프리카의 식수가 부족한 아이들을 위한 수도관 건립 사업을 위해 더 많이 우승해야 한다고 했던 소감은 많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돌고 돌아 다시 필드로 와 '행복한 골퍼'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이일희. 많은 골프팬과 동료들은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고 '절친' 신지애는 '넌 내게 영감을 줬어'란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일희는 "문자를 받고 진짜인가 싶었다. 깜짝 놀랐지만 골프를 즐기고,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고, 항상 그런 영향력을 주고 싶다"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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