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당시 지방선거를 통해 군수가 바뀌며 대회가 중단됐다. 지역출신 당구선수로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만약 다시 서천에서 당구대회가 열린다면 강원도 양구대회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있는 대회가 되길 기원해 본다.
필자는 현재 대한당구연맹 이사로서 국회의원 출신인 대한당구연맹 박보환 회장님을 모시고 있다. 역대 당구연맹 회장님들의 이력을 살펴보니 경기인, 기업인, 정치인 출신 등이 있었다. 1955년에는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 회장에 국회부의장 이재학 씨가 역임한 적도 있다. 5.16 군사정변 전까지는 당구 위상이 높았다는 걸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우리나라에 당구가 유입된 1900년대 대한제국 말 왕실을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에서 귀족들의 사교문화로 성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 일본에서 4구문화가 들어와 오늘날 우리 당구 근간을 이루게됐다. 이어 6.25를 겪으며 주한미군을 통해 포켓볼이 들어왔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양귀문(당구명인)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서울에서 50년대~ 60년대 초까지 포켓볼 내기 당구가 꽤 성행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포켓볼이 미국 갬블문화의 하나였을 때이니 말이다. 미국도 80, 90년대를 거쳐 포켓볼이 건전한 토너먼트 문화로 변화하기까지 상당한 진통과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포켓볼을 사행성 게임으로 치부해 법으로 금지시켰으니, ‘칼럼 1편’에서 언급한 90년대 초 압구정동 포켓볼 열풍이 불 때까지 약 30년간 포켓볼 암흑기였다.
아울러 70년대 당구장에 도박과 건달 출입이 횡행하며 4구문화도 점점 퇴색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당구 이미지가 추락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당구가 가난한 대학생들의 여가생활로 명맥을 유지하며 우리나라 당구 뿌리의 한 축이 됐다. 그래서인지 4구, 3구는 경기불황에도 잘 견디는 생명력을 지닌 것 같다.
80년대에는 미성년자가 당구장을 출입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제한돼 있었다. 당시 고3이던 필자는 당구장에서 불시검문 나온 경찰에 붙잡혀 반성문 쓰고 훈방조치되기도 했다.
지금 당구선수를 꿈꾸는 학생들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집이나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1993년 헌법재판소 ‘청소년 출입제한 위헌’결정이 날 때까지는 말이다.
개인사를 잠시 얘기하자면 당구가 좋아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 3학년때 가출, 당구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았다.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도 없이 문득 선수가 되어 세계대회에 도전해 보자는 꿈만 있었다.
그래서 한국당구아카데미를 찿아가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당구 기량을 연마하며 선수입문을 하게 됐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서야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아버지는 친척 형님인 조규광 당시 헌법재판소장님께 저를 소개해주셨고, 조 헌재소장님은 “앞으로 당구도 스포츠종목으로 자리잡을 테니 열심히 해서 훌륭한 선수가 되라” 고 격려말씀을 해주셨다. 이러한 연유로 필자에게 자그마한 당구에 대한 사명감 같은게 자리잡게 됐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당구가 전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아가려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3구, 4구문화에 포켓볼까지 더해진다면 그 어떤 종목보다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녀 손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종목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구야말로 세대간 격차를 줄이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종목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이런 당구가 우리 사회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받게되길 기대해 본다.
[조필현 대한당구연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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