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현대산업개발은 광운대 역세권 개발 현장에 도입하려 한 배치 플랜트를 설치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건설사가 배치 플랜트 도입을 검토한 건 안전상 이유다.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는 "현장 인근에 약 4000가구 규모 아파트가 위치하고 통학로와 일반 도로가 인접해 있어 수백 대 레미콘 차량이 이동할 경우 지역사회 교통안전이 우려돼 배치 플랜트 설치를 검토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검토 소식이 전해지자 레미콘운송노조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건설사들의 현장 배치 플랜트 도입이 확산할 경우 일감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배치 플랜트는 지하 공사 등 대형 토목 공사 현장에 설치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주택 건설 사업엔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현대건설이 서초구 반포주공 1·2·4주구 재건축 현장에 배치 플랜트를 세우기로 결정한 게 첫 사례다. 이후 이 건설사는 한남3구역 재개발 현장에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레미콘운송노조 입장에서는 현장 레미콘 생산 사례가 늘면 그만큼 생계가 위협받게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노조 측은 현대산업개발의 모든 공사 현장에 대한 레미콘 운송을 거부하는 한편 배치 플랜트 설치 인허가 기관인 노원구청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노조가 거세게 반발하자 노원구는 국토부에 배치 플랜트 설치와 관련한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배치 플랜트 설치 조건은 '건설 공사 품질관리 업무지침'에 규정돼 있다. 지침 43조엔 대규모 구조물 공사로 레미콘 수요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경우 현장 배치 플랜트를 설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규모 구조 공사는 레미콘 일간 최대 소요량이 출하 능력 여유분으로 생산할 수 있는 최대치를 초과하는 경우가 일주일 넘게 지속되는 걸 뜻한다.

현대산업개발 측은 노원구 인근 경기 구리·남양주시 등에 있는 15곳 레미콘 공장의 현재 생산 실적을 바탕으로 여유분을 계산해 배치 플랜트 설치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국토부는 인근 공장 생산량이 충분하다는 노조 측 의견에 손을 들어주며 해당 현장이 배치 플랜트 설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노원구도 이러한 국토부 유권해석에 따라 설치가 불가하다는 의견을 현대산업개발 측에 전달했다.
배치 플랜트 도입 철회에 따라 현대산업개발 측은 주민 안전을 고려해 새벽 시간대에 레미콘을 생산·운송하기로 했다. 새벽 시간대 운송비엔 1.5배 할증이 붙는다. 이는 레미콘 제조사가 부담할 예정이지만 결국 자재비에 반영돼 현대산업개발 측도 함께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게 건설사 측 설명이다.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는 "야간 운송비가 주간 운송비의 2배 이상 될 수 있고 결국 레미콘 공장의 생산비가 자재비에 반영돼 비용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비용 부담뿐만이 아니다. 건설 품질과 안전 문제도 있다. 2023년 4월 발생한 인천 검단 아파트 지하 주차장 붕괴사고 원인 조사 결과 기준에 못 미치는 저강도 콘크리트가 사용된 점이 지목된 바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레미콘 콘크리트 타설은 혼합 시작부터 부어넣기 종료 때까지 90~120분 안에 완료해야 하며 온도와 현장 여건에 따라 제약이 많다.
새벽 시간대에 레미콘을 운송하게 될 때 적정 시간 내 콘크리트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이 복잡해지면서 공사 난도도 높아지게 된다. 아울러 새벽 시간대 레미콘 운송 상황에 따른 기사들의 운행 안전 문제도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운행 중 교통·안전 사고 위험은 야간이나 새벽 시간대가 주간보다 훨씬 높다. 더 큰 문제는 이번 광운대 역세권 개발 현장에서 노조가 현장 레미콘 설치를 저지하면서 서울 도심 건설 현장에서 이러한 분쟁이 확산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성수동과 개봉동 등에 있던 서울 내 레미콘 생산 공장이 철거되며 서울 내 레미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반면 서울에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재건축·재개발 정비사업이 활성화하며 향후 레미콘 수요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교통 혼잡 등으로 레미콘을 적기에 공급하기 위한 여건이 악화하며 배치 플랜트 도입을 검토하는 건설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반면 최근 노란봉투법을 비롯해 노동법 규제 강화로 노조는 힘을 받는 상황에서 분쟁 때 정부가 노조 편에 서면서 비슷한 결론이 날 가능성이 커지게 됐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현장에 배치 플랜트를 설치한다고 해도 여전히 수요량의 50%는 인근 공장에서 운송을 통해 공급받아야 한다"며 "노조의 반발을 이유로 배치 플랜트 설치를 가로막는 행태는 결국 건설업 혁신을 가로막고 위험을 더 높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배치(batch) 플랜트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 등 재료를 조합해 레미콘을 만드는 대형 설비다. 레미콘을 운반 차량으로 공수하는 대신 현장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유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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