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여의도 국회가 아닌 지방에서 정치를 시작한 '언더독'이었지만 불과 10여 년 만에 민주당의 정치 엘리트들을 모두 휘하에 두는 카리스마를 구축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국졸' 소년공, 변호사가 되다

이 후보는 소년공으로 일하면서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자격을 획득했다. 1982년 학비 지원과 생활비 20만원까지 받고 중앙대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중앙대 법대 초임 교수였던 이상돈 전 국회의원은 "워낙 똑 부러져서 입학 당시에도 교수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후보는 종종 "대학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접하고 삶이 통째로 바뀌게 됐다"고 고백하곤 한다. 공장 생활 당시엔 '폭도'로만 알고 있던 5·18 민주화운동의 현실을 대학에 가서 제대로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1986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1988년 사법연수원(18기)을 수료한 뒤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하다

2006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성남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고배를 마셨다. 2007년 대선에서는 정동영 후보의 비서실 수석부실장을 맡았다. 2008년 18대 총선에선 성남 분당갑에 출마했지만 역시 떨어졌다. 이 후보는 2009~2010년 정세균 대표 체제에서 민주당 부대변인을 역임했는데, 이것이 당대표로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유일한 여의도 정치 경험이다.

성남시장 이재명은 2016년 또 한 번 정치적 변곡점을 맞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가장 먼저 '탄핵'을 주장한 그는 박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에 도전해 경선에서 21.2%를 득표하며 3위에 올랐다. 변방의 이름 없는 언더독으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첫 번째 대선 도전이었다.
변방을 벗어나 정치권 중심으로
2018년 그는 좀 더 '큰물'에 뛰어들게 됐다.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다. 이는 16년간 보수 정당 후보가 차지해온 자리를 탈환한 것이었다. 이재명에게 많은 시선이 쏠렸지만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계곡 불법 건축물 철거, 코로나19 당시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 검토, 전국 최초의 재난기본소득 등 저돌적 행정은 때로 논란을 불렀지만,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후보는 2021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낙연 전 총리를 누르고 본선에 진출하면서 두 번째 대권에 도전했다.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금융' 등 이른바 '기본 시리즈'를 앞세워 정책 선명성을 강조했다. 당내 세력 기반이 약했지만 대중성과 메시지로 돌파했다. 하지만 두 번째 대선도 고배를 마셨다. 당시 윤석열 후보에게 역대 대선 최소 격차인 0.73%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그는 정치적 공백을 택하지 않고 곧바로 중앙정치에 복귀했다. 2022년 6·1 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 같은 해 치러진 당대표 선거에서 77.77%를 득표해 승리했다.
피습과 대표 연임으로 민주당 장악
여의도에 들어온 뒤에도 이 후보의 정치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변호사비 대납 의혹, 쌍방울 관련 수사 등 사법 리스크가 끊이지 않았다. 친문(문재인)계와의 갈등도 지속된 끝에 결국 2023년 가을에는 자신을 향한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는 정치적 위기를 마주했다. 이 후보는 24일간 단식으로 저항했고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지난해 1월 2일에는 부산 북항 방문 중 흉기에 목을 찔리는 정치 테러를 당했다. 서울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같은 해 4월 치른 22대 총선에서는 172석을 확보하며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같은 해 8월에 진행된 당대표 선거에서는 85.4%라는 압도적 지지로 재선출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24년 만의 당대표 연임이었다. 사법 리스크에서도 일정 부분 벗어났다. 가장 위험하다던 공직선거법 1심에서 징역 1년·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전부 무죄를 받은 것이다. 재판은 대법원 판결만 남겨뒀다.
비상계엄과 탄핵, 그리고 조기대선
그는 총선 후 무소불위의 국회 권력을 100% 이용하며 윤석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3년 뒤를 준비하던 이 후보의 대선 시계는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며 적극적인 여론전에 나섰고, 2주 만에 속전속결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서 의결했다. 그리고 극심한 진영 대결 끝에 헌법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자 이 후보의 대권 가도가 활짝 열렸다. 이 후보의 정치 인생은 상당 부분 스스로 길을 만들어내는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타협 대신 대결을 택하는 일도 잦았다. 진영 간 인물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게 된 배경이다. 변방의 끝단에서 시작한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 오를 수 있을지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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