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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넘게 사망하는 희귀병 걸린 10개월 아기...‘이것’이 살려냈다 [교과서로 과학뉴스 읽기]

10개월 아기, 맞춤형 유전자 편집 치료로 생명 위기 넘겨 초정밀 ‘베이스 에디팅’ 기술로 돌연변이 고쳐 ‘온디맨드 치료’ 시대 개막… 생명공학 혁신이 사람을 구하다

  • 원호섭
  • 기사입력:2025.05.16 18:18:31
  • 최종수정:2025-05-18 14: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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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아기, 맞춤형 유전자 편집 치료로 생명 위기 넘겨
초정밀 ‘베이스 에디팅’ 기술로 돌연변이 고쳐
‘온디맨드 치료’ 시대 개막… 생명공학 혁신이 사람을 구하다

미국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의 의료진이 세계 최초로 개인 맞춤형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치료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습니다. 이를 통해 생후 10개월 된 아이가 혜택을 받았는데요.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를 정밀하게 교정하는 유전자 가위 치료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논문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못된 유전자‘만’ 고치자
필라델피아 아동병원 연구진의 논문
필라델피아 아동병원 연구진의 논문

이번 치료의 주인공은 생후 10개월 된 남자아이 KJ 멀둔입니다. 그는 초 희귀 유전자 질환인 ‘CPS1 결핍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단백질을 분해할 때 생기는 독성 물질인 ‘암모니아’를 처리하지 못하는 병으로, 뇌 손상과 사망 위험이 매우 큽니다. 130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이 질환은 환아의 절반 이상이 영아기 중 사망하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최선의 치료법은 간 이식이지만, 대기 기간이 긴 만큼 필라델피아 아동병원 연구진은 다른 선택지를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입니다.

멀둔을 살린 기술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 중에서도 ‘베이스 에디팅’이라 불리는 정밀한 방법입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를 잘라내고 붙이는 방식인데, 베이스 에디팅은 DNA를 자르지 않고 염기 하나를 화학적으로 바꾸는 정밀한 기술입니다. 즉 유전자를 구성하고 있는 염기인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이민(T) 중 한 개를 정밀하게 교정하는 것입니다.

멀둔의 경우 부모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돌연변이로 CPS1 효소가 제대로 생성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 몸에는 ‘요소 회로’라는 게 있습니다. 암모니아를 요소로 바꾼 뒤 소변으로 배출하는 시스템인데요, 이 회로의 첫 번째 단계에서 암모니아를 처리하는 핵심 효소가 바로 CPS1입니다.

의료진은 이 결함을 베이스 에디팅으로 고치기 위해 멀둔의 유전자 염기 서열을 정밀 분석하고, 그에 맞는 편집 도구, 즉 유전자 가위를 설계합니다. 이 유전자 가위는 ‘지질 나노입자(LNP)’라는 특수한 포장에 담겨 주사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고, 이 포장이 간세포로 정확히 전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간세포로 이동한 이 유전자 가위는, 간세포의 잘못된 유전자 염기 서열을 고칩니다. 그렇게 수정된 간세포가 CPS1 효소를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보통 새로운 유전자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수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이번 치료제는 단 6개월 만에 개발됐습니다. 필라델피아 아동병원, 펜실베이니아대학, UC버클리 등이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6개월 만에 연구진은 멀둔에게 필요한 베이스 에디터를 설계하고, 이를 담아서 보낼 수 있는 물질을 만들고, 줘와 원숭이에서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한 뒤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까지 마쳤습니다.

단 6개월만에 설계에서 승인까지
멀둔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치료 후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사진=필라델피아 아동병원]
멀둔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치료 후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사진=필라델피아 아동병원]

2024년 11월, 첫 투여 이후 멀둔은 세 차례에 걸쳐 치료(주사)받았습니다. 치료 후 단백질 섭취량이 정상 수준으로 증가했고 암모니아 제거를 위해 넣어줘야만 했던 약물 의존도도 줄었다고 합니다. 감기 같은 일반적인 감염에도 암모니아 수치가 위험 수준까지 오르지 않는 등,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약물 완전 중단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지만, 의료진은 “부작용 없이 증상이 개선됐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번 사례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이 개인 맞춤형 정밀 의료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생명공학계의 혁명’이라 불리며 전 세계를 뒤흔든 기술입니다. 간단한 설계로 DNA를 정밀하게 수정할 수 있어 암, 유전질환, 희귀 질 치료의 가능성을 열었고, 농업·바이오 분야에서도 활용돼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공통된 유전자 결함을 지닌 ‘다수의 환자’를 위한 대량 치료제 개발이 주류였습니다. 이번 멀둔의 사례는 크리스퍼 기술이 단 한 사람을 위한 정밀한 맞춤 치료 도구로 쓰인 첫 사례입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개발한 공로로 20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제니퍼 다우드나(그는 이 기술의 상용화를 위해 IGI라는 기업을 설립했고 이번 연구에 참여했습니다)는 “그동안 꿈꿔왔던 ‘온디맨드(On-demand) 유전자 치료’ 시대의 서막”이라며 의미를 짚었습니다. 온디맨드란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쓸 수 있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소수 환자만을 위한 맞춤형 치료는 높은 개발비용과 시간 문제로 상업적 확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번에도 수많은 기관과 기업의 무상 지원, 정부 기관의 신속 승인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다만 인류는 어려울 것이라 여겼던 희귀 질환 치료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많은 연구비가, 이러한 연구에 투입돼 하루빨리 상용화가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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