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첫 확장현실(XR) 헤드셋 '비전프로'가 시장에 나온 지 1년이 됐다. 비전프로는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캐나다 등을 거쳐 지난해 11월 한국에 상륙했다. 애플은 이 제품을 자사의 첫 '공간 컴퓨터'로 정의했다. 기존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의 디지털 경험을 강조했다. 이 지점에서 의아한 대목이 있다. 애플이 혼합현실(MR)이나 XR 같은 익숙한 개념이 아닌 '공간 컴퓨터'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80년대 맥(매킨토시)이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열고, 2000년대에는 아이폰이 스마트폰의 혁명을 이끌었던 것처럼 또 한 번 기술의 역사를 새롭게 쓰려는 애플의 강한 의지로 풀이된다. 애플의 전략은 성공할 수 있을까. 비전프로를 한 달간 체험하며 발견한 가능성과 과제(한계)를 짚어봤다.
첫인상은 '합격점'이었다. 2015년 애플워치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신규 하드웨어인 만큼 굉장히 공들여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처음 기기를 시착하기에 앞서 페이스ID를 통해 사용자 안면부를 인식하고, 얼굴형에 맞는 틀을 맞춤화하는 것부터 고급진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플 특유의 감성이 묻어 나오는 일관된 디자인도 좋았다.
외관보다 더 만족스러웠던 것은 성능이었다. 앞서 개인적인 기회를 통해 여러 XR 기기를 접해 봤지만 고해상도의 콘텐츠 화질만큼은 비전프로가 현재로서는 최고인 듯싶다.
대표적인 예로 비전프로의 '공간 사진' 기능은 실제 육안으로 보는 모습보다 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3D처럼 생생한 사진을 직접 찍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앨범 보관함에 있던 사진도 탭 한 번으로 자연스러운 입체감을 부여해 놀라웠다. 특히 '공간 비디오' 기능은 실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인 것처럼 몰입감이 최고였다. 대형 스크린으로 확대도 가능하다 보니 마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로 개인적인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기능이었다.
콘텐츠를 시청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비전프로와 연동된 별도 앱을 통해서는 방구석 한 공간이 3D 영화관이 되고, 또 어떨 때에는 스포츠 직관의 현장이 되면서 이것저것 영상물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배가됐다. 4K나 8K 해상도의 자연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힐링 그 자체였다.
특히 비전프로와 연동된 애플TV에선 실제 극장처럼 앞줄, 가운뎃줄, 뒷줄 등 좌석을 선택해 화면 구도를 개인 맞춤형으로 설정할 수 있는 부분이 세심하게 다가왔다. 기본적으로 화면을 크게 늘렸다가 줄이는 등 내가 원하는 화면 크기대로 볼 수 있다는 점 역시 요긴했다.
전용 컨트롤러 없이 손과 눈(시선)으로 기기를 조작하는 형태도 간편했다. 마우스를 아이콘에 가져다 두듯 앱을 쳐다보기만 해도 인식이 되는 것이 제법 신기했다. 또 마우스를 더블 클릭하는 동작은 엄지와 검지를 맞닥뜨려 꼬집는 형태여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익숙함의 정도는 개인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업무의 연장선 측면에선 맥과의 디스플레이 연동을 통해 대형 화면을 공중에 띄울 수 있다는 것(미러링)이 좋았다. 별도의 모니터를 두지 않더라도 노트북의 제한된 화면에서 벗어나 시야 가득 가상 디스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보니, 그 안에서 여러 작업 창을 동시에 띄워도 시각적으로 무리가 없었다. 이 밖에 '환경' 보기를 통해 주변 모습을 남태평양의 보라보라섬과 같은 대자연 공간으로 바꿔 시각적인 방해 요소를 최소화하는 것도 꿀기능이었다.
반면 단점과 한계도 분명했다.
'공간 컴퓨팅이 이런 거구나'라는 강렬했던 인식만큼 499만원대부터 시작하는 높은 가격대와 600g이 넘는 무게는 앞으로 애플이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로 보인다.
우선 XR 기기의 고질적 문제인 '불편한 착용감'을 비전프로도 비켜가지 못했다. 처음 착용했을 때에는 기기와 내 머리가 안정적으로 밀착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30분이 경과하고 1시간이 흐르자 목에 큰 피로도가 느껴졌다. 이와 함께 항시 구비해야 하는 외장 배터리 무게까지 합치면 1㎏에 달하기에 오랜 시간 착용하면서 뒤따라오는 불편함은 감수하기 힘든 요소였다. 이 문제로 체험 후반기로 갈수록 기기를 지속적으로 써보는 것이 선뜻 와닿지는 않았다.
또 외장 배터리를 기기에 연결해도 최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약 2~2시간 반으로 비교적 길지 않다 보니 실외 사용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비전프로 실사용자들의 후일담에서 나온 멀미나 두통은 느끼지 못했다.
256GB 기준 499만원대부터 시작하는 높은 가격도 비전프로가 대중화되지 못한 악재로 작용한 듯싶다. 일반 사진이나 비디오보다 더 큰 용량을 요구하는 공간 콘텐츠의 특성을 고려할 때 최적화된 공간 컴퓨팅 환경을 경험하려면 512GB도 부족할 수 있다. 결국 사용자는 1TB까지 선택지를 넓혀야 하는데, 이 경우 가격은 559만원으로 불어난다.
여전히 콘텐츠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지점도 애플이 심사숙고해봐야 할 부분이다. 일례로 비전프로용 3D 콘텐츠 시청을 위한 앱은 선택지가 다양한 편이었지만, 실제 개별 앱이 서비스하고 있는 몰입형 비디오 목록은 풍성하지 않았다. 또한 실감형 게임 등 대중성 있는 엔터테인먼트 앱 리스트에서도 기존 게이밍 전용 XR 기기와 견줘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많다고 보긴 힘들었다.
물론 기존 XR 기기 상당수가 게임 등 실생활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비전프로는 의료·커머스 등 특정 산업권에도 적용 가능한 공간 컴퓨터를 지향하고 있다. 비전프로를 수술에 활용하는 사례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결국 애플이 비전프로 후속 모델에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은 이 대목일 듯하다. 전문가용으로 진화할 것인지, 아니면 보다 대중적인 모델로 새로운 승부수를 던질 것인지. 비전 프로가 애플이 그리는 공간 컴퓨팅 세상의 '예고편'이라면 '본편'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을 키우는 이유다.
공간컴퓨팅이란?
가상 세계와 물리적 환경을 융합해 현실을 디지털 공간처럼 조작하는 기술. 물리적 공간 제약 없이 업무·취미 활동(콘텐츠 관람·운동) 등 다중 작업 가능한 게 장점.
[고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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