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개혁 미루더니…현실이 된 ‘일본화’
한국 경제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2030년대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0%대에 진입할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이 나왔다. 경제 구조 개혁을 소홀히 하면 2040년대 초반에는 잠재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질 것이란 예측이다.
이미 한국을 먹여 살릴 핵심 산업은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다. 중국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의 대대적인 공세로 석유화학, 철강, 배터리 등 주요 산업은 맥을 못 춘다. 그나마 버텨온 반도체마저 범용 메모리 시장이 극심한 부진에 빠지면서 머지않아 핵심 기술이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곳간이 점차 비어가며 벼랑 끝에 선 한국 기업들은 알짜 사업부까지 매물로 내놓고 치열한 생존 경쟁에 뛰어든 양상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0.75명대에 그치는 상황에서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머지않아 국가 소멸 위기에 돌입할 것이란 비관론도 팽배하다. 이 와중에 조기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저마다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내면서, 우리나라도 남미처럼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국내외 연구기관의 내년 국내총생산(GDP) 잠재성장률 전망이 1%대로 수렴하는 등 한국 경제 추락 징후가 도처에서 목격된다. 국회 예산정책처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잠재성장률 추락을 경고했다. 최근 수년간 저성장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구조 개혁은 번번이 뒤로 밀렸다. 산업계 일각에선 최근 가파른 ‘제조업 공동화(Industrial Hollow-Out)’와 맞물려 한국 경제가 과거 일본이 겪었던 ‘좀비 경제’의 어두운 터널로 진입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한국 경제 잠재성장률 ‘0%’ 시점이 10년 앞당겨졌다. 잠재성장률은 한국 경제가 현재 생산성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달성 가능한 성장률을 뜻한다.
KDI는 잠재성장률이 2040년 0%로 추락하고 2040년대 후반부턴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칠 것으로 경고했다. 3년 전 KDI는 성장률 0% 시점을 2050년으로 예상했는데 10년이나 앞당겨진 것. 우리 경제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초반 연 5% 안팎이었지만 20년 만에 2%로 반 토막 난 데 이어, 15년 뒤 0%가 된다는 섬뜩한 경고다. KDI는 잠재성장률을 올해 1.8%, 내년 1.6%로 예상했다. 최근 우리 경제 실제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현상이 지속됐는데, 이번엔 잠재성장률 전망치마저 큰 폭으로 낮아졌다.

OECD도 경고 메시지를 냈다.
한국의 내년 잠재성장률을 1.98%로 예측해 올해(2.02%)보다 0.04%포인트 낮췄다. 특히 2017~2026년 10년간 한국의 잠재성장률 하락폭이 1.02%포인트로 같은 기간 OECD 회원국 평균 하락폭(0.19%포인트)보다 5배 크다. 앞서 국회 예산정책처도 3월 경제 전망에서 한국의 올해 잠재성장률을 1.9%로 내렸다.
잠재성장률 추락 원인은 복합적이다.
첫째, 총요소생산성(TFP·Total Factor Productivity) 둔화다. 잠재성장률은 노동과 자본 투입으로 설명된다. 노동과 자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잔여 성장분이 총요소생산성이다. 여기엔 조직 효율, 제도적 환경, 혁신 전환·흡수력 등이 포함되며 일반적으로 기술 진보로 해석된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대체로 3% 안팎 증가율을 유지해왔으나 2011년부터 1% 정도로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총요소생산성은 기술 혁신 그 자체보다는 조직·제도·노동 시장의 혁신 흡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본다. 결국 한국이 지난 수십년간 IT 기술 고도화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음에도 총요소생산성이 추락한 것은 구조 개혁 지체로 영역 간 혁신 확산에 제동이 걸린 결과로 분석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노동생산성 격차가 2배가 넘는 등 극심한 양극화가 단적인 예로 지목된다.
결국 구조 개혁 지체는 ‘좀비기업’ 양산을 낳고 종국에는 자본 배분 비효율성을 높인다는 지적이다. 이는 생산성 높은 신생·혁신 기업으로 자원 이동을 가로막아 ‘기술 혁신 확산 저하 → 총요소생산성 둔화’의 악순환을 낳는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둘째, 주요 기업의 경영 보수화다. 국내 기업 상당수는 첨단 기술은 미국에, 전통 산업에서는 중국에 주도권을 내줘 ‘중간기술압박(Middle Tech Squeeze)’에 놓인 처지가 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진단이다. 이는 불확실성 심화를 초래해 설비투자 기피 → 잉여자금 축적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한국산업은행이 종업원 50명 이상인 국내 기업 4000곳을 조사한 결과, 2025년 국내 기업 설비투자액은 233조원으로 집계됐다. 제조 대기업은 전년 대비 설비투자 증가율이 지난해 8.1%에서 올해 0.9%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됐다. 대기업 설비투자(123조6000억원)는 전체 제조업의 84%를 차지한다.
셋째, 내수 경제를 좌우하는 민간 소비 둔화 장기화다. KDI에 따르면, 한국의 민간 소비 증가율은 지난 20년간(2004~2024년) 연평균 3%에 그쳤다. 이 기간 국내 GDP 연평균 성장률(4.1%)을 꾸준히 밑돌았다. GDP에서 민간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2004년 52.1%에서 2024년 48.5%로 3.6%포인트 줄었다.

역인센티브 구조도 고질적 병폐
문제는 이 같은 악순환을 가속하는 요소가 우리 경제 도처에서 목격된다는 데 있다.
대내외 요인이 중첩된 국내 제조업 공동화가 첫손에 꼽힌다. 도널드 트럼프발 관세 전쟁과 중국발 공급 과잉(대외 요인), 규제를 비롯한 역(逆)인센티브 구조(국내 요인)가 맞물려 우리 기업 상당수는 해외로 생산기지를 줄줄이 옮기는 중이다. 2028년까지 미국에 총 210억달러(약 31조원)를 투자하는 현대차그룹뿐 아니라, 앞서 조 바이든 행정부 때도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 시설투자가 줄줄이 해외에서 이뤄졌다. 이는 생산기지 해외 이전 → 국내 생산시설 노후화 → 신기술 도입 지연 → 국내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는 것이 전문가 지적이다.
특히, 국내 설비투자보다 해외 투자가 많은 ‘투자 역조’가 고착화되면 우리 경제 잠재성장률은 구조적으로 악화일로를 걸을 공산이 높다. 잠재성장률은 노동 증가율, 자본 증가율, 총요소생산성(TFP) 등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국내 설비투자는 ‘자본 축적(Capital Accumulation)’의 핵심 요인이다. 국내 설비투자가 줄면, 자본 축적이 정체되거나 줄어 잠재성장률 하향 조정이 불가피하다. 해외 투자는 타국에 자본이 축적되므로, 한국 GDP에 기여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 정책이 없으면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포지티브 규제, 경직된 노동 환경도 성장률을 잠식하는 고질적인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해외 진출 기업 306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국내 리쇼어링 저해 요인 1위로 포괄적인 노동 규제(29.4%)가 지목됐다. 직무·성과 기반 유연한 임금 체계가 아닌 데다 노동 환경 유연성도 낮다는 분석이다.
위기 진단과 해법도 벌써 수년째 반복됐지만, 문제는 실행이다. KDI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 추락을 막기 위해 ▲혁신 기업의 시장 개척 여건 조성 ▲규제 개선을 통한 경쟁 촉진 ▲임금 체계 개편과 노동 시간 규제 완화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모두 낯설지 않은 진단이다.
하지만 기업 혁신·노동 시장 유연화 같은 구조 개혁은 번번이 이해관계 조율에 난항을 겪다 좌절됐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2월 “그동안 구조조정도 하지 않았고 새로운 성장 동력 산업도 키우지 못한 채 기존 산업에만 의존해온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라며 “이것이 현재 우리의 실력”이라고 지적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장기화하는 내수 경기 침체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 데다 대외 변수 악재로 수출 전망마저 어두운 상황”이라며 “이대로 간다면 일본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0호 (2025.05.21~2025.05.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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