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가 사실상 ‘제로 성장’의 어두운 터널로 진입한 가운데 한때 세계 시장을 휩쓸던 주력 산업 성장 엔진도 꺼져가고 있다. 철강·석유화학 등은 중국의 무차별적 밀어내기 공세로 신음하는 가운데 가전·반도체 업종에선 ‘레드테크’ 역습이 매섭다. 상수로 자리 잡은 중국 공세에 미증유 관세 전쟁에 따른 불확실성 증폭으로 우리 기업은 유례없는 복합 위기를 마주했다.

고위험군 석유화학·철강
수익성 기반 뿌리부터 ‘흔들’
다수 전문가들은 위기 강도가 가장 높은 산업군으로 석유화학과 철강을 지목한다. 이들 산업은 사실상 구조 개혁 적기를 놓친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 철강 업계는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특히 철강 업계는 고율 관세로 미국에 진입장벽이 생겨 중국산 저가 철강이 유럽·아시아 등 세계 각지를 휩쓸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 경우 손익분기점이 완전히 무너져 공장을 돌려봐야 고정비도 충당하지 못하는 최악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다. 이미 지난해 국내 철강 업계 가동률은 60% 수준에 그쳤다.
석유화학 역시 비관론이 가장 짙은 업종으로 꼽힌다. 롯데케미칼은 2024년 영업손실이 8941억원으로 3년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친환경 메가 트렌드 ▲중국의 공격적인 증설 ▲중동 산유국의 탈(脫)석유 경제(Post-Oil Economy)까지 ‘전환기 리스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게 다수 전문가 진단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이 석유화학 공장을 대규모로 증설하자 시장은 공급 과잉 상태로 변질됐다. 주요 석유화학 제품 가격은 하루가 멀다 하고 추락했다. 중동 산유국마저 탈(脫)석유 전략에 드라이브를 걸고 ‘다운스트림’ 산업 고도화에 나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석유화학 산업은 공정, 제품 가공 정도에 따라 ▲업스트림(석유화학 기초 원재료인 나프타 쪽에 가까운 제품) ▲미들스트림 ▲다운스트림(석유화학 산업 최종 제품인 합성수지, 합성고무, 합성원료 쪽에 가까운 제품) 등 다층 산업 구조로 이뤄진다. 아람코를 비롯해 산유국 석유 기업은 수직 계열화 구축을 위해 줄줄이 다운스트림 산업 투자에 나서고 있다.
이 여파로 국내 석유화학 업종 이자보상배율은 전 업종 가운데 가장 큰 폭 감소세를 보였다(리더스인덱스 자료). 이자보상배율은 기업이 남긴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얼마나 잘 갚을 수 있는지, 상환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수치가 낮을수록 상환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석유화학 업종 이자보상배율은 2021년 12.34에서 지난해 0.64로 급락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고탄소 배출 산업인 데다 중국과 중동의 공세적 투자로 석유화학의 위기 강도가 가장 높아 보인다”며 “불경기 터널을 지나더라도 구조적으로 회복이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위험군 디스플레이·가전·IT
‘레드테크’ 맹공에 속수무책
디스플레이·가전·IT 기기도 다수 전문가가 위험군으로 지목한다. 이들 산업에선 중국 파상공세가 실질적 위협 요인으로 대두됐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동안 세계 시장에서 중국 제품은 ‘저가’ 이미지가 강했지만 최근 들어 소비자 인식이 확 달라졌다는 진단이다. 중국 기업은 기술 연구개발(R&D)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해 빠르게 기술력을 끌어올렸다.
TV 시장점유율 변화는 우리 기업의 흔들리는 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장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2024년 글로벌 TV 시장에서 중국산 점유율은 사상 처음 한국을 넘어섰다. 출하량 기준 중국 TV 브랜드인 TCL·하이센스·샤오미 합산 점유율은 31.3%로, 삼성전자·LG전자 합산 점유율 28.4%를 앞질렀다. 중국은 프리미엄 TV 시장도 호시탐탐 위협한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글로벌 프리미엄 TV 시장에서 중국 TCL은 20% 점유율로 LG전자(19%)를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삼성전자(29%)가 차지했지만, TCL·하이센스가 1년간 점유율을 각각 8%포인트, 6%포인트 끌어올려 격차를 크게 좁혔다.
디스플레이 산업도 중국 추격에 안심할 처지가 못 된다.
국내 산업계는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을 중국에 넘기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체질을 바꿨지만 대중국 경쟁 강도가 해마다 다르게 뛰고 있다. OLED만 놓고 보면 아직 국내 기업 위상은 확고하다. 지난해 글로벌 OLED 시장에서 한국 점유율은 스마트폰 54.4%, 태블릿 69.3%, 노트북 76.2%다.
문제는 중국의 맹추격이다. 중국 디스플레이 설비투자 가운데 OLED 비중이 2027년 83%로 한국(13%)의 6배를 넘고(카운터포인트리서치) 2028년 중국 OLED 생산능력이 한국을 넘어설 것(DSCC)이란 경고도 나온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업체 BOE가 고난도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패널인 ‘저온다결정산화물’(LTPO) OLED 시장에 진입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으로 산업계는 보고 있다.
IT 기기 분야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스마트폰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핵심 신흥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이 점유율을 크게 늘려 1위를 달리거나 선두 자리를 위협받는 처지다. 인도가 단적인 예다. 시장조사 업체 IDC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 1분기 인도 스마트폰 출하량 점유율 16.4%를 기록했지만, 1위 비보와 격차는 더 벌어졌다.
반도체도 ‘경고등’
범용 메모리 시장 中 장악
우리 경제 버팀목이던 반도체 산업도 이상 징후가 한둘이 아니다. 세계 반도체 산업이 범용 메모리에서 HBM 같은 AI 칩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우리 기업이 강점을 보이던 표준화된 생산능력으로는 맞춤 수요에 대응하기 힘들어졌다. 범용 D램 시장에선 창신메모리 등 중국 기업 공세로 손익분기점이 사실상 무너진 가운데, 고부가가치 반도체 시장에서도 수익성 방어가 녹록지 않다는 진단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우리 반도체 수출은 올 들어 성장세 둔화 흐름이 뚜렷하다. 반도체 수출액 증감률(전년 동월 대비)은 2024년 10월 40%, 11월 31%, 12월 32% 등으로 순항하다가 올 1월 8%로 급락하더니 2월엔 -3%로 주저앉았다. 지난 3월 증감률은 12%로 반등했지만, 2024년 3월 증감률(36%)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충격의 진원지로 창신메모리를 비롯한 중국발 공세가 지목된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체 기업은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 만들어낸 현금흐름으로 선단 공정·기술에 집중 투자해 초격차를 유지하는 전략을 폈다. 창신메모리 등 중국 기업 지배력이 커질수록 범용 시장을 지렛대 삼아 미래 기술에 투자해온 우리 반도체 기업 성장 공식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특히, 중국 창신메모리는 DDR4, LPDDR4X 등 시장에서 공격적 설비투자로 범용 반도체 공급 과잉을 주도한다. 이 여파로 삼성전자는 범용 D램 일부 품목 생산을 중단한다. 첨단 공정 분야도 안심할 상황이 못 된다. 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주요 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대부분 중국에 밀렸다.
한 반도체 장비 업계 CFO는 “중국 기업 주도로 DDR4 시장 손익분기점이 무너지면 DDR5로 공급 집중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DDR4보다 상대적으로 마진이 뛰어난 DDR5 시장 손익 구조도 버티기 힘든 국면이 펼쳐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엔지니어는 “예전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던 중국 D램이 이 정도 속도로 치고 올라왔다는 점이 두려운 상황”이라며 “특히 최근 수년간 반도체 선단 공정에서 예전보다 미세화에 들어가는 자본적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반면, 기술적 난도 상승으로 미세화를 통한 원가 절감 속도는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0호 (2025.05.21~2025.05.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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