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주요 6개국 통화(유로화·엔화 등)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4월 29일 기준 99.1이다. 최근 1년 중 최저치다. 수년간 강(强)달러 현상이 지속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달러 약세 기조가 이어지자 투자자 셈법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최근 환영받지 못했던 환헤지형 상장지수펀드(ETF) 상품이 주목받는 분위기다. 펀드명 끝에 (H)가 붙는 환헤지형은 환율 변동 영향을 제거해 본래 성과만을 반영한다. 일반적으로 달러가 약세로 전환하고 변동성이 클 때 안정적 수익을 낼 수 있다.


환헤지 vs 환노출 차이는
환율 영향 적용 여부
환헤지형은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차단하는 거래 방식이다. ETF 상품을 둘러보면 상품명 뒤 ‘(H)’가 붙은 상품을 찾을 수 있다. 이 상품이 환헤지형이다. 여기서 H는 헤지(Hedge·울타리)의 약자다. 나스닥이나 S&P500 등 해외 지수를 추종하는 ETF의 경우 환율이 수익률에 직결된다. 그런데 환헤지형은 이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지수 등락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구조다. 반대로 상품명 뒤 ‘(H)’가 붙어 있지 않다면 환율 영향을 그대로 받는 환노출형이다. 환율로 인해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매수 시점 원화 대비 환율은 1500원, 매도 시점 환율은 1400원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투자 대상 자산이 수익(10달러 → 11달러)을 냈더라도 환차손에 의해 온전한 수익을 못 누린다. 매수 시점 환율을 적용하면 원화 기준 1만6500원을 돌려받아야 하지만 환차손으로 1만5400원만 돌려받게 된다. 1500원 수익이 400원으로 크게 줄어드는 셈이다. 반면 환헤지형은 환율 영향 없이 수익 그대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환헤지형 ETF는 환노출형보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달러 강세가 지속되는 구간에서 굳이 환율을 헤지할 이유가 없었을뿐더러 헤지를 위한 연간 수수료(1~2%)도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부 애널리스트 사이에선 “환헤지형은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약달러 현상이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환헤지형 ETF가 재차 관심을 끄는 모습이다.
ETF 매입 관련 지표에서도 분위기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일단 채권형 ETF 부문은 환헤지형 상품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코스콤 ETF체크에 따르면 4월 29일 기준 최근 일주일 동안 자금 순유입 10위 목록에 환헤지형 상품 4개가 이름을 올렸다. 특히 미국 장기채에 투자하는 한국투자신탁운용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는 484억원이 몰려 순유입 3위를 기록했다. 이 밖에도 미래에셋자산운용 ‘TIGER 미국30년국채커버드콜액티브(H)’가 4위, 삼성자산운용 ‘KODEX 미국30년국채액티브(H)’가 5위로 집계됐다. 순유입 규모는 각각 438억원, 271억원이다. 주식형 ETF 부문에서도 환헤지형 강세가 두드러진다. 4월 29일 기준 미래에셋자산운용 ‘TIGER 유로스탁스50(합성 H)’, ‘TIGER 차이나항생테크레버리지(합성 H)’, 삼성자산운용 ‘KODEX 차이나H레버리지(H)’ 등이 순유입 10위권에 올랐다.
투자자별로 살펴보면 외국인 투자자의 환헤지형 수요가 크게 늘었다. 삼성자산운용 ‘KODEX 미국빅테크10(H)’은 4월 29일 기준 최근 일주일간 외국인 투자자 순매수 상품 7위에 올랐다. 엔비디아와 아마존, 애플, 브로드컴 등 미국 빅테크 10개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ETF 중 환헤지형 상품이다.

약달러 지속 가능성 대두
“환헤지형 비중 늘릴 수밖에”
당분간 환헤지형 ETF 수요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달러 약세를 점치는 의견이 많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의 카막샤 트리베디 글로벌 외환·금리·신흥시장 전략 총괄은 “달러와 미국 관련 자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됐다”면서 “(강세를 예상해온) 달러에 대한 견해를 바꿔야 한다. 달러 약세가 지속되고 더 심화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스위스 픽테자산운용의 수석 전략가 루카 파올리니도 “앞으로 5년 내 달러화 가치는 추가로 10~15% 하락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오승훈 삼성자산운용 투자리서치센터장도 “관세 협상 불확실성, 환율 절상 요구 등이 예상돼 올해 3·4분기까지는 원·달러 환율 하락이 우세할 것”으로 전망한다.
달러 약세가 예상되는 건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공약에서 “달러 강세가 미국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며 달러 약세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정책의 중심에는 ‘트럼프 경제 책사’로 불리는 스티븐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발간한 ‘글로벌 무역 시스템의 재구성 사용자 가이드’에서 “달러 가치 고평가로 미국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관세를 인상해 미국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1985년 ‘플라자 합의’와 같은 적극적인 달러 약세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다. 이를 고려하면 최근 트럼프의 행보는 약달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트럼프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게 지속적으로 금리 인하를 압박 중이다. 일각에선 파월 해임설까지 제기될 정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현지 시간) “(파월을) 해임할 의사는 전혀 없다”면서도 “그가 기준금리를 낮추는 방안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브라운브라더스해리먼의 윈 씬 글로벌시장 전략 책임자는 “달러 약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연준 독립성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고 있고 (파월 해임) 가능성이 언급된다는 사실 자체를 매우 심각하고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 의도는 현실이 되고 있다. 관세 등 각종 불확실한 정책에 미국 자산 신뢰도가 뚝뚝 떨어지며 달러 가치도 약세로 전환 중이다. 김유미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관세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미국 자산 신뢰도를 두고 의구심이 이어질 것”이라며 “미국의 교역 상대국들이 대미국 무역 흑자 축소로 미 국채와 주식 등 미국 자산 매입을 줄일 수 있고 이는 채권 시장 내 변동성을 높여 달러 약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금값 급등도 달러 불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칼라니시인덱스서비스의 리리앙레 애널리스트는 “올해 금값 급등은 미국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그 어느 때보다 낮다는 걸 보여준다”면서 “트럼프 트레이드가 ‘셀 아메리카’로 바뀐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환헤지형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형성된 셈이다. 한동훈 삼성자산운용 매니저는 “최근 미국 증시 조정으로 저가 매수 기회를 엿보는 투자자가 늘고 있지만 연초부터 1400원대로 급등해 있는 환율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라며 “환헤지형 ETF는 미국 주식에 투자하면서도 환율 리스크는 줄일 수 있어 중장기 투자자에게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8호 (2025.05.07~2025.05.13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