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경영 성적을 바탕으로 등급을 다시 매겨 기업별로 내줄 수 있는 대출 규모와 금리 수준을 재조정하는 것이다. 은행들이 고위험 산업군을 집중 모니터링 대상으로 정하고 향후 경기 상황에 따라 대출을 조이는 등 건전성 수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신용등급이 깎이면 은행권에서 받을 수 있는 금리가 올라가고 여신 규모도 줄어들어 자금 경색에 빠질 공산이 커진다.
문제는 이달 미국발 관세 전쟁 확대에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터지며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점이다. 중소·수출기업을 비롯한 취약업종은 대출 등 자금 창구가 좁아질 위험에 처했다.
금융당국과 정치권은 취약기업을 대상으로 금융권이 자금 지원을 늘리라고 연일 압박에 나섰다. 시중은행이 건전성 관리와 당국의 자금 공급 압박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날 금융위원회는 권대영 사무처장 주재로 5대 금융지주 재무 담당 임원을 소집해 기업 자금이 경색되지 않도록 금융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현장 자금 수요와 업종별 대응 여력을 점검하고, 이에 따른 지원 방식을 구체화하는 안건이 테이블에 올랐다. 국민의힘 정무위원회도 9일 5대 은행장과 회동하며 소상공인 지원 방안을 논의한다. 이에 앞서 지난 7일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4대 금융지주 회장과 만나 "필요한 자금 지원이 적시에 이뤄질 수 있도록 각별히 챙겨달라"고 요청했고, 4대 금융지주는 35조원 규모로 중소기업·소상공인 금융 공급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금융감독원은 자금 공급을 독려하는 대신 자본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당근'을 내놨다. 이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관세 부과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자본 규제와 관련해 인센티브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권 자본 규제 강도를 낮추고, 보험사는 부채 평가 기준 정비 등 제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 기간을 주는 방안이 거론됐다.
이를 바라보는 은행권 속내는 복잡하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은행이 시장에 원활히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는 당국 입장도 이해가 가지만, 잠재 부실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연체 관리를 강화해 건전성을 개선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며 "취약기업 자금 리스크에 대한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시중은행은 회계법인 감사를 받는 외부감사 대상 기업(외감기업) 결산 이후 5~6개월 이내에 신용평가를 재조정한다. 문제는 지난해부터 전 세계 경기 둔화 전망이 두드러지며 악화했던 실적이 이달부터 단계적으로 반영된다는 점이다. 분위기는 좋지 않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국내 기업(금융업 제외) 부채는 2798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0조원가량 늘어 분기 기준 역대 최고로 불어났다.
미국 관세 충격에 기업의 기초체력은 앞으로 더 많이 깎일 전망이다. 하나금융연구소에 따르면 상호관세 부과로 자동차·부품, 철강, 산업용 전자제품 등의 대미 수출은 13% 줄고 국내 부가가치 손실 규모는 10조6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시중은행들은 일단 당국 요청대로 취약 부문 지원을 이어가되 실시간으로 자금 시장 동향을 분석한다는 방침이다.
[김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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