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실적 부진…갈라파고스 증후군
29조원.
2024년 3분기까지 5대 시중은행이 벌어들인 이자 이익 규모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등 주요 제조업체의 영업이익을 모두 합친 금액을 크게 웃도는 금액이다. 상황이 이렇자 한편에서는 경제 불확실성과 고금리 상황 속에서도 은행은 막대한 이익을 쌓으며 국민 주머니에서 돈을 빨아들이는 ‘전당포 영업’을 한다며 비판한다. 은행 본연의 역할과 책임을 묻는 목소리 역시 덩달아 커지고 있다. 급기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6개 대형 은행장을 소집, 관련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다. 은행권 이익 독식 논란. 그 속살을 들여다본다.
역대급 돈잔치.
은행권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지난해 5대 시중은행 이자이익은 총 41조3878억원에 달한다. 전년 대비 1조9266억원 늘어난 수치로 사상 최대 실적이다. 이자이익은 예대마진(예금과 대출 금리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쉽게 말해 은행이 고객으로부터 예금을 받아 이를 다시 대출해주는 과정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의미한다. 이자이익이 역대급이라는 말인즉슨 빌려준 돈에는 이자를 높게 받고 고객이 맡긴 돈(예금)에는 이자를 짜게 줬다는 말이다.
지난해 11월만 놓고 보면 5대 시중은행 가계대출 예대금리차는 1~1.27%포인트까지 치솟았다. 2023년 8월 이후 최대폭이다.
디지털 혁신을 추구한다는 인터넷은행으로 눈을 돌려보면 그 차이는 더하다. 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인터넷은행의 가계 예대금리차(예금과 대출 금리 차이)는 지난해 11월 신규 취급 기준 1.4~2.48%포인트에 달한다. 출범 당시 각 인터넷은행은 ‘금융권 메기가 될 것’이라며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지난해 실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점포 비용이 없으니 예대마진만 더 극대화됐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그러면 역대급 실적을 쌓는 동안 업계 환경은 어땠을까? 좋기는커녕 오히려 악재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KB국민은행 등 주요 은행 간담을 서늘케 했던 홍콩H지수 ELS 배상 사태를 비롯, 각종 금융사고로 은행은 금융감독당국은 물론 고객에게 지탄을 받았다. 그럼에도 혁신, 소비자보호 강화, 내부 통제 등은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외형 성과는 화려해 보이지만 내실이 부실하면 국내 은행이 ‘갈라파고스 증후군’에 시달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갈라파고스 증후군’은 특정 환경에만 적응한 시스템이나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잃는 현상을 말한다. 참고로 지난해 국내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 해외 부실채권 규모(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실 자료)는 지난해 상반기 기준 18억5600만달러로, 2023년 연간 수준(20억5700만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사정이 나빴다.
물론 국내 은행 경쟁력이 낮아지는 이유를 내부에서만 찾자는 얘기는 아니다. 금융 규제와 관치 역시 이런 상황에 한몫했다. 금융당국은 자산건전성, 안정성을 앞세워 다양한 규제를 시행해왔다. 그런데 금융사의 디지털 혁신과 글로벌 진출 등 시대 요구에 발맞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 규제가 망분리 제도다. 망분리는 보안 강화를 위해 금융사 내부망과 외부망을 분리하는 제도다. 이는 보안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디지털 금융과 인공지능(AI) 활용에 있어 걸림돌이 됐다. 물론 금융당국은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최근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긴 한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샌드박스’ 형태로 제한적 허용에 그치고 있어,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이런 규제 환경에 익숙해져버린 은행 역시 ‘혁신 없는 안정’에 기대는 이른바 ‘아기 코끼리 사슬 증후군’에 빠졌
다는 내외부 평가가 나온다. 어릴 시절 발목이 쇠사슬로 묶여 움직일 수 없었던 코끼리가 어른이 돼 쇠사슬을 풀어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비유한다. 이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의 대표 사례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규제는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보장한다. 그러니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해외 시장에 진출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규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이익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총평했다. 그렇다고 노사관계가 선진화됐다고 볼 수도 없다.
최근 2023년 기준 직원 1인당 평균 연봉이 1억1821만원으로 5대 은행 중 가장 높은 KB국민은행 노조가 파업 결의를 한 사례만 봐도 그렇다.
‘은행 불패’ 신화 IMF 때 깨져
IMF 외환위기 때 대동·동화·동남·경기·충청은행 등 5개 은행은 물론 숱한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다. 꼼꼼한 심사 과정을 건너뛰고 경쟁적으로 기업·부동산대출에 열을 올린 결과다. 이를 통해 ‘금융 라이선스(면허) 사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깨진 바 있다.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한때 국내 금융사가 혁신금융의 전범으로 벤치마킹해야 한다던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례가 의미심장하다. 출범부터 스타트업 대출·지원을 표방하며 자산을 공격적으로 늘렸던 이 은행은 고금리 시대로 전환하자 각 스타트업이 현금 비중을 높이는 이른바 ‘뱅크런’ 사태로 결국 문을 닫았다.
은행도 언제든 망할 수 있다. 과연 국내 은행은 얼마나 미래 대비가 돼 있을까.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5호 (2025.02.05~2025.02.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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