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빌리어드뉴스 MK빌리어드뉴스 로고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셀트리온 | ② 이왕 죽는 거 마지막까지 해보자

  • 손현덕
  • 기사입력:2025.06.04 14:27:21
  • 최종수정:2025-06-04 14:29:02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트룩시마
트룩시마

기 부회장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영국 힐튼 맨체스터 호텔에서 직원들과 함께 데이터 수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가 묵고 있는 방은 18층에 있었는데 3월인데도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호텔 방에서 밖을 내다보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냥 떨어지고 싶었습니다. 눈도 내리니 낭만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왕 죽는 거 마지막까지 해보자는 생각에 영국 임상분석업체인 아이콘 대표에게 ‘당신들도 책임 있지 않느냐’며 인력을 총동원하고 교대 근무를 해서 24시간 장비를 돌려보자고 했던 거죠. ‘당신 잘 시간에 나는 일하겠다’고 배수진을 친 겁니다.”

사실 기 부회장이 죽겠다는 각오로 덤빈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회사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있었고 유럽의 승인을 못 받으면 그야말로 셀트리온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램시마의 유럽 허가를 신청한 지 1년 가까이 됐는데도 허가가 나지 않자 시장에서는 온갖 억측이 나돌았습니다. 그중 최악은 한국 식약처에 뇌물을 주고 승인받은 거 아니었느냐는 것이었어요. 식약처도 이런 루머를 들은 모양입니다. 하루가 멀다고 유럽 승인은 어떻게 돼가냐고 채근하는데 심장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만약 유럽 허가를 못 받으면 헛소문이 사실이 되는 형국이었지요. 그리고 회사는 분식회계 의혹에 휘말렸습니다. 개발회사인 셀트리온은 매출액 절반 이상의 영업이익을 냈는데, 판매회사인 셀트리온헬스케어는 매출액의 절반을 훨씬 넘는 규모의 적자가 나 투자자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됐고, 주가는 폭락했습니다. 공매도 이슈도 겹쳤고 금융감독원은 주가조작 혐의로 서 회장에 대한 조사에 나섰습니다.”

기 부회장은 그래서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번에 우리가 유럽 허가를 받지 못하면 그야말로 코리아게이트가 터질 것이다. 우리 모두 교도소 담벼락 위을 걷고 있는데, 전부 그 안으로 떨어진다. 죽을 각오로 대처하자”고. 서 회장도 이 무렵 심신이 매우 불안정했다고 실토한다.

“당시 계속되는 공매도와 임상 실패설, 그리고 허위 매출과 재고 논란 등으로 감독 당국은 물론 투자자들로부터도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분노와 피로가 누적돼 있었죠. 특히 공매도로 인해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결국 셀트리온 임직원과 해외 파트너사들이 피해 없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내려놓는 게 최상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래서 셀트리온을 매각하겠다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서 회장은 셀트리온을 팔지 않았다. 그는 “5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의 외국 자본이 들어와 위기를 넘기게 됐다”며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다국적 제약사에 회사를 팔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매각을 중단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EMA의 허가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래야 주가 하락세도 막고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의혹에서 벗어나는 궁극의 열쇠가 EMA 허가에 있었던 것이지요.”

2013년 5월 30일이 셀트리온 25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에 해당하는 이유다. 그 이전의 셀트리온과 그 이후의 셀트리온을 구분하는 탈각(脫殼)의 순간. 만약 그때 허가를 못 받았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을 것이다.

우리는 남들이 안 가본 길을 간다
인천 송도에 자리한 셀트리온 전경.
인천 송도에 자리한 셀트리온 전경.

의약품은 크게 합성의약품과 바이오의약품으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먹는 감기약이나 소화제 같은 건 대부분 합성의약품으로 화학적으로 합성된 분자화합물 치료제다. 이에 비해 바이오의약품은 생물체(주로 면역세포)가 생산하는 단백질 기반의 치료제로 화학 공정이 아니라 생명공학적 방식으로 생산한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과 세포 배양 등의 방법이 동원된다. 합성의약품에 비해 부작용이 적고 효과는 뛰어나다. 암이나 류마티스 관절염 등 난치성 질환에 사용되는 약은 대개 바이오의약품이다. 기본이 단백질이기 때문에 분자의 크기가 크고 복잡하다. 통상 합성의약품의 1000배는 된다. 비유하자면 합성의약품은 주기율표에 나오는 원소를 이어놓은 레고블록 형태라면 바이오의약품은 철사 뭉치 같은 구조라고 보면 된다. 항체라는 게 단백질이고 이는 아미노산이 수백 내지 수천 개 연결된 사슬이기 때문이다. 이 사슬들이 구불구불하게 접히고 꼬여서 철사 뭉치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원가가 높고 가격이 비싸다.

제약회사라면 모두 다 남들보다 앞서 효능이 있는 의약품을 세계 최초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른바 신약 개발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모든 약은 안전하고 효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임상을 통과해야 한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엄청나게 소요된다. 웬만한 기업들은 아예 손도 못 댄다. 대부분 신약 개발은 글로벌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돈과 시간을 들여 신약을 개발하면 독점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게 되는데, 신약을 개발하게 되면 그때부터 특허가 걸린다. 통상 20년은 보호되는데 실제 시판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족히 10년은 경쟁자 없이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워낙에 신약 개발이 힘드니 이런 인센티브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떼돈을 벌 수는 없다. 특허 기간이 만료되면 누구나 복제약을 만들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제약업체들의 전쟁터이다. 한번 만든 것이니 따라 하기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복제약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역시 안전성을 입증해야 하고 기존 오리지널 제품과 효능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합성의약품과 바이오의약품이 크게 차이가 난다. 합성의약품은 분자구조가 같으면 생물학적 동등성이 입증된다. 비교적 개발 기간도 짧다. 통상 특허 기간이 만료되는 즉시 복제약이 나온다. 그 전부터 준비하고 있다가 바로 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걸 제네릭(Generic)이라 부른다. 반면 바이오의약품은 똑같이 만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같은 회사에서 내놓은 오리지널 약품도 어느 공장에서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는 게 바이오의약품이다. 그래서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은 오리지널과 비슷하다고 시밀러(Similar)라 부른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