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출판사로 시작한 ‘무제’서
김금희 ‘첫 여름, 완주’ 출간
고민시 참여 오디오북 만들고
화가·도예가 등 작가들과 협업
본인 사진 작품도 함께 전시도

“책을 책으로만 남겨두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책에서 나올 수 있는 다른 2차 창작물들을 계속 만들어나가려고 해요. 그게 이번에는 전시가 된 거고, 다음엔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죠.”
배우 박정민(38)이 자신의 출판사 무제(無題·MUZE)에서 출간한 첫 오디오북 ‘첫 여름, 완주’를 체험형 미술 전시로 만들었다. 그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전시가 책 독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박정민은 “오디오북 출간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어두운 곳에서 소설을 들어보게 됐는데, 오직 소리만 존재하는 깜깜한 공간에서 오히려 모든 감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며 “다른 분들도 이런 느낌을 체험해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완주: 기록: 01’이란 이름으로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서울 성북구 성수동 LCDC 서울 1층의 팝업 공간인 ddmmyy에서 오는 6월 9일까지 개최된다. 한번에 최대 8명까지만 전시장에 입장할 수 있고, 회차별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매회 관람객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암실에 들어가 앉은 뒤 10분 간 소설 ‘첫 여름, 완주’의 일부를 오디오북으로 먼저 듣게 된다. 이어 전시장의 조명이 켜지면 20분 간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자유롭게 관람하는 식이다. 화가, 도예가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 8인의 작품과 함께 박정민이 작업한 풍경 사진 1점도 함께 전시된다.


‘첫 여름, 완주’는 김금희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완주마을에 도착한 손열매가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온정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설 용기를 되찾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책은 박정민이 무제 대표로서 기획한 ‘듣는 소설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이기도 하다. 기획 단계부터 오디오북을 염두에 두고 시각장애인들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오디오북은 출간 직후인 이달 초 교보문고에서 스테디셀러인 양귀자의 ‘모순’을 앞서 오디오북 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종이책 역시 소설 부문 일간 1위와 주간 7위 등을 기록했다.
박정민은 “무제의 첫 책인 ‘살리는 일’을 출간할 때쯤 아버지께서 사고로 시각을 잃으셨다. 그게 계기가 돼 (시각 외 다른) 감각에 집중하는 삶에 함께 공감해보고자 시작한 일이 듣는 소설 프로젝트”라며 “처음 목표는 10권 정도였는데 하다 보니 조금 더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세 번째 책의 작가까지는 정해진 상태”라고 밝혔다. 다만 그는 “사실 시각장애의 형태는 굉장히 다양하다. 그래서 그분들의 감각을 경험해 보시란 말은 감히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시도 전시 자체로 봐주시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정민은 전시에 참여할 작가들을 직접 섭외하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공간을 구성하는 등 전반적인 전시 기획을 총괄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평소 눈 여겨 보던 작가분들께 이메일을 보내 협업을 제안했다. ‘첫 여름, 완주’를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달라고 부탁드렸다”며 “유명세보다는 무제와 결이 맞는 분들을 섭외하고자 했고 대부분 젊은 작가들이다. 사실 제 취향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서로 다른 매체로 소설을 재해석했다. 예컨대 정지윤 작가는 어느 여름날 우산를 들고 있는 인물을 그렸고, 정하현 작가는 거칠면서도 단아한 형태의 도자를 빚었다. 우상희 작가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사진 작품을 선보인다. 옛 영화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벽화 작가 김반장의 그림에는 이번 오디오북 녹음에 참여한 배우 고민시, 김도훈, 염정아, 최양락 등이 등장한다. 또 일러스트레이터 나무13은 시티팝 풍의 일러스트로, 싱어송라이터 윤마치는 아름다운 음율이 있는 악보로, 김소영 작가(글씨당 대표)는 ‘완주’를 정감 있게 쓴 캘리그래피로 ‘첫 여름, 완주’를 변주했다.
무제는 지난 2020년 1인 출판사로 출발했다. 현재는 직원 1명까지 2인 출판사 체제로 운영 중이다. 박정민은 “사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대학 자퇴 후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접하게 됐다”며 “항상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내 안의 창작욕 같은 것들을 가장 익숙하면서도 저렴하게 풀 수 있는 게 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책에 머물지 않고 전시 등 다른 문화예술 영역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지난 15일에는 무제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직접 기획한 ‘첫 여름, 완주’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해 말 박정민은 ‘연기 활동을 1년 간 중단하겠다’고 선언해 팬들을 놀라게 했다. 영화 ‘동주’ ‘사바하’ ‘하얼빈’ 등 지난 10여 년 간 쉬지 않고 달려온 다작 배우였기 때문이다. 박정민은 “그동안 너무 띄엄띄엄 운영해왔다 보니 배우 박정민의 돈이 무제로 흘러들어가는 순간이 생기더라. 출판사를 할 거면 출판사 돈으로만 운영해야지 안 그럼 너무 나태해질 것 같아 휴식기를 갖기로 했다”며 “지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나중에 다시 영화 작업에 들어가도 사업이 유지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놓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출판사 일에 몰입하다 보니 오히려 다음 영화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고도 했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제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실망할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또 누군가가 저를 (배우로) 선택하면 다시 현장으로 갈텐데 그때가 좀 궁금해요. 이전에도 열심히 안 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쩌면 좀 더 열심히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촬영 현장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때 지금처럼 아이디어를 계속 낼 수도 있고요. 내가 캐릭터를 어떻게 더 풍부하게 만들어볼 수 있을지 궁금해졌어요.”
한편 전시 개막일인 지난 19일 전시장 앞은 박정민의 팬들로 북적였다. 이날 오전 전시 홍보를 위한 촬영 차 현장을 찾은 박정민은 1회차와 2회차 관람에 직접 도슨트로 나서는 깜짝 팬서비스를 했다. 무제에 따르면, 이날 전시는 18회의 전 회차가 모두 마감되며 큰 관심을 받았다. 전시 관람 예약은 ‘카카오톡 예약하기’에서 가능하다. 관람료는 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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