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나 인생에 한 번쯤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을 갖고 싶어.”
연극 ‘헤다 가블러’에서 주인공 이혜영이 금발에 스모키 화장을 하고 하얀 실크 소재의 옷을 입은채로 말했다. 모든 것을 가진 그이지만 삶이 지루할 뿐이다. 결국 그는 극 말미에 연기가 자욱한 무대 위에서 권총을 든 채 희열의 춤을 춘다. 그 권총이 자신을 향하자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원조 헤다’ 이혜영이 13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이혜영은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는 듯 표정 하나, 손짓 하나 자연스러웠다. 2012년 초연 당시 헤다 역을 소화한 이혜영에게 제5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 연기상,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의 영예를 안겼던 작품이다.
연극 ‘헤다 가블러’는 135년 된 고전 희곡이다. ‘근대 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표했다.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성이자 자신의 성인 가블러를 붙인 채 살아가는 헤다를 앞세워, 남성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적인 여성의 주체를 과감히 천명하면서 과거 남성 중심적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번 ‘헤다 가블러’는 무대나 의상·소품 모두 현대적으로 꾸며지며 오늘날의 헤다로 재해석됐다. 따라서 여성보다 인간의 실존 의지를 더욱 깊게 다루고 있다. 박정희 연출은 “작품을 하면서 개인을 구속하는 구조주의의 최면 속에서 자아의 본질을 찾고자 헤매고 있는 오늘날의 헤다들에게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어떤 손을 내밀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헤다 역은 복잡미묘한 캐릭터라서 저마다 해석이 다르다. 특히 이번에는 공교롭게 연극 ‘헤다 가블러’ 두 편이 나란히 개막했다. 배우 이영애와 이혜영이 각각 주연을 맡은 LG아트센터 ‘헤다 가블러’와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가 비슷한 시기에 공연을 시작한 것이다.
이혜영의 헤다는 마성의 매력에 초점이 맞춰졌다. 누구나 그에게 자신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카리스마 있고 자기주관이 뚜렷한 이혜영은 다른 주변인물에 휘둘리기보다는 스스로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고자 자기파괴를 행한다. 반면 이영애의 헤다는 아름다운 매력에 초점이 맞춰졌고, 복잡미묘한 캐릭터로 보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인물로 그려졌다.
두 작품의 연출은 중극장과 대극장을 각각 잘 살렸다. 이혜영의 헤다는 500석 규모 중극장인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다음달 1일까지 공연 중이다. 무대가 보다 압축적이고 명료하다. 장면 중간중간에 전자기타·현악기 음악을 넣어 극의 몰입감을 높였고 결정적인 순간에 슬로우 모션을 활용해 일부러 정적인 순간을 줘 관객들에게 생각할 틈을 줬다.
반면 이영애의 헤다는 1300석 규모 대극장인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 LG 시그니처홀에서 다음달 8일까지 공연 중이다. 이영애의 복잡한 표정을 라이브캠을 통해 스크린에 보여주는 기법을 썼다. 회색빛 무대가 거대하면서도 기하학적 공간으로 구성됐고,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