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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중고기계 … 소멸 앞둔 인간 같아

한국계 미국작가 레이첼 윤
지갤러리서 亞 첫 개인전

  • 송경은
  • 기사입력:2025.05.14 16:48:59
  • 최종수정:2025-05-14 23: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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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작가 레이첼 윤.  지갤러리
한국계 미국작가 레이첼 윤. 지갤러리
제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처분된 중고 기계들이 달그락거리며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온갖 데서 분주한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지만 이 공간에 살아 숨 쉬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무로 만들어진 오리 장난감 세 개는 모니터 속 무릉도원을 향해 열심히 달리지만, 이들은 낡은 트레드밀(러닝머신)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다. 모니터에 비친 무릉도원 역시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낸 가짜 장소에 불과하다. 한국계 미국 작가 레이첼 윤이 제작한 이 설치 작품의 제목은 'No Pain No Gain(노력 없이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노력 없이 원하는 걸 얻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중고 기계와 무생물의 허무한 움직임에 빗대 꼬집은 것이다.

레이첼 윤의 아시아 첫 개인전 'NO SWEAT'가 오는 5월 31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지갤러리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사지 기기, 운동 기기, 전동 육아용품 등 중고품과 모조 식물, 유아 운동화 등 각종 사물을 결합해 만든 키네틱 설치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 제목인 'NO SWEAT'는 말 그대로 '땀 흘림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격렬하게 움직이지만 실질적인 생명력이 없는 기계들은 움직임은 있으나 땀 흘림(노력)은 없는, 그래서 아무런 성취도 없는 비극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반응이라도 하는 듯 꽃잎을 폈다 접길 반복하는 대형 모조 식물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계들에 실리콘 같은 소재로 만든 가짜 땀방울이 매달려 떨어질 듯 말 듯 흔들리는 모습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레이첼 윤이 작업에 중고품을 사용하는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7년 전 발 마사지기를 사용하는데, 마사지기가 그냥 돌아가기만 할 뿐 마사지를 잘하지 못하더라. 자기 일에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가 흥미를 끌었다"며 "쓸모를 다하기도 전에 버려지는, 새 것 같은 상태의 중고 기계들이 언젠가는 소멸할 위기에 처한 우리와 닮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중고 거래를 통해 작업 재료로 쓸 중고품을 사 모았다. 이번 전시작 중 일부는 한국에서 구한 중고품으로 제작됐다.

레이첼 윤의 작업은 한편으로 이민자인 아버지가 꿈꿨던 '아메리칸드림'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동경과 좌절, 진정과 모조 사이의 긴장감을 탐구한다. 그는 "끝없이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는 게 보통의 이민자가 처한 상황이다. 더 나아지지 못하면 실패로 여겨지는 게 현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겪어 보니 이민자들의 실패는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더라"고 말했다. 노력해도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 역시 또 다른 허망함을 불러일으킨다는 설명이다.

1994년생 작가는 미국 워싱턴대 미대 졸업 후 지난해 미국 예일대 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나이트갤러리, 독일 갤러리 소이 캐피탄 등에서 최근 개인전을 개최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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