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을 낯설게 보고 인간 내면의 욕망을 드러냈던 초현실주의는 균형과 질서, 도덕과 통제를 중요시했던 당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종의 위험한 발상으로 여겨졌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초현실주의 운동을 펼쳤던 예술가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일이 허다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사회는 일제 탄압과 전쟁으로 더욱 경직돼 있었다.
김욱규와 김종남, 김종하도 1930년대 일본에서 초현실주의 회화를 몸소 경험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언어로 풀어내고자 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욱규는 미군부대에서 초상화 등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는 한편, 두 평 남짓의 골방에서 홀로 작업에 매진하며 평생 400여 점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세상과 단절된 채 어느 누구에게도 작품을 보여준 일이 없었다. 그는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장남은 아버지가 별세한 이듬해인 1991년 유작전을 열었다. 이제껏 열린 김욱규의 개인전은 그 전시가 유일하다.

경상남도 산청 출신의 재일한국인으로 일본에서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김종남은 새와 인간, 식물과 인간 등 이종이 결합된 생명체나 기이한 생명체들이 복잡하게 얽힌 장면들로 내면의 불안을 화폭에 풀어냈다. 자화상 '나의 풍경'(1980년)이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숨은그림찾기와 같다. 일례로 '새들의 산아제한'(1978년)은 언뜻 평범한 녹색의 풍경화같이 보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풀숲의 보호색 아래 숨어 있는 곤충과 동물, 인간 등을 찾을 수 있다. 박혜성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 학예연구사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충실히 묘사하면서도 (인간의 눈에는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낯선 감각을 연출하는 작가 특유의 스타일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김종하는 일본 가와바타화학교를 졸업하고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56년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그랑 쇼미에르 아카데미 등에서 수학하며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 작업들을 발표했다. '색장갑'(1957년)이 대표적이다. 색장갑을 판매하는 상점의 쇼윈도 광경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일상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독특하고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김영환과 신영헌 작품에서도 유럽 초현실주의의 특징이 나타나지만, 이들은 광복 후 세워진 국내 미술대학 1세대 졸업생으로 한국 미술사 토대 위에 형성된 독특한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보여준다. 김영환은 함경남도 안변 출신으로 홍익대를 졸업한 후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문학성·환상성이 강한 구상과 기하학적 추상,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애니미즘적 세계를 그리는 데 열중했다. 일례로 '자화상 풍경'(1962년)에서 얼굴만 등장하는 거인은 땅에서 솟아난 낯선 존재로 그려졌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신영헌은 광복 직후 서울로 내려와 서울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6·25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주로 실향민 화가, 종교화가로 알려진 그는 전쟁과 분단으로 고통받는 조국 산천과 자본주의로 비인간화된 도시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과 결합한 기이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박 학예연구사는 "1960년대 말부터는 여러 이미지를 중첩시킨 '이중 영상'을 매개로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면서도 "하지만 이것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 세계를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 오브제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자신의 작업에 적용했던 박광호는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고향인 대구로 돌아와 30여 년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미술계와의 교류에는 소극적이었다. 그에게 초현실주의 회화는 억압된 정념과 물신숭배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창구였다. 전시작 '음양'(1970년대 중반)에는 여성의 가슴, 입술, 성기, 고대 어패류 화석 등 다양한 오브제가 명암과 깊이감 있는 공간감을 통해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연출돼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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