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왁주의 광대한 석회암 동굴 속을 걷다
수백만 마리 박쥐 떼 볼 수 있는 디어 동굴
총 길이 200km에 달하는 클리어워터 동굴의 장대함
보르네오섬 서부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물루에 자리한 ‘구눙물루 국립공원’을 찾았다. 높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외딴 마을 물루는 주변에 도로가 조성되어 있지 않아 오직 비행기로만 닿을 수 있다. 관광지보다 전 세계 지질학자를 대상으로 동굴과 열대우림 탐험을 위한 연구장소로 더 유명한 곳, 이토록 광대한 동굴 속을 유영하며 초현실적인 세계로 빠져 들었다.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산악지역의 외딴 마을 ‘물루(Mulu)’로 향하다
보르네오섬 서부는 말레이시아 사바주와 사라왁주, 브루나이 3개로 나뉜다. 사바주의 주도인 코타키나발루에서 시작된 여정은 브루나이 전역으로 이어졌고, 이제 마지막 지역인 사라왁주로 향한다. 국토의 37.5%를 차지하는, 말레이시아 행정구역 가운데 가장 면적이 큰 곳이 사라왁주이지만 면적에 비해 여행이 가능한 곳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면적의 대부분이 높은 산악 지역과 넓은 열대 우림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라왁주만의 지리적 특성과 자연, 문화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관리되고 있는 국립공원의 수는 무려 30여 개. 이 중 높고 험준하게 솟은 산들로 둘러싸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눙물루 국립공원(Gunung Mulu National Park)’이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다.

국립공원이 자리한 물루 마을까지 이동수단은 오직 비행기뿐이다. 다시 말해 마을을 잇는 주변 도로가 건설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외딴 섬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한데 더 흥미로운 건 1974년 이래 사라왁주 정부에서 마을 주변 도로 건설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
이유는 국립공원의 생태적 무결성 추구를 바탕으로 자원을 파괴하는 행위를 전면 차단하기 위해서다. 더욱이 자연 보호의 일환으로 물루 공항을 오가는 비행기 운항 횟수도, 말레이시아에서 물루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공항도 매우 제한적이다. 공항은 코타키나발루와 미리, 쿠칭 단 3곳뿐이다.

브루나이 국경 근처에 위치한 사라왁주 북동쪽 해안 도시의 미리(Miri) 공항에서 물루행 비행기를 탔다. 탑승구에서 티켓 확인을 마치고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까지는 두 발로 걸어서 이동한다. 72인승 작은 비행기 내부에 승객이 반쯤 차 있고 대다수는 창가 쪽 좌석을 점령하고 있다. 창문 너머로 산악 지역의 특별한 풍경을 눈에 담으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이륙 후 얼마 안가 착륙 준비에 돌입, 물루 공항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공항은 마치 운동장 같다. 시골 마을의 간이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에 가까워 보였다. 작아도 너무 작은 규모에 일단 놀랐다. 미리 공항에서 72인승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를 맞닥뜨렸을 때와 다르게 이곳 물루 공항이 워낙 협소해 프로펠러 비행기가 대형 비행기 못지 않게 공항을 장악하고 있는 풍경이다. 공항에서 빠져나오면 거기서부터 마을 초입이라는 점도 협소한 규모에서 오는 낯선 재미. 그러니까 공항에서 숙소까지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외딴 마을에 조성된 길은 오직 하나, 도로와 인도가 혼재되어 사람과 차량, 오토바이가 한데 뒤섞인 채 길 위를 오간다.

동굴 탐험의 중심, 구눙물루 국립공원
홈스테이 집 마당에 들어서자 주인장 로버트(Robert)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여행자를 맞이한다.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 전 체크아웃한 손님방을 청소하느라 분주한 그의 아내 디나(Dina)가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숙박시설로 사용되는 별채는 10여 년 전 부부가 손수 짓고 꾸몄다고 했다. 인구 2,000명에 불과한 물루 마을은 주민 대다수가 이들 부부처럼 홈스테이 운영을 하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하늘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주인장의 주된 임무. 결항은 곧 예약 취소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지리적으로 많은 강수량과 짙은 안개, 비구름의 출현이 잦은 이 산악지역은 과학의 예측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이상기후 현상에 따른 변동성이 더욱 심화돼 예기치 않게 결항이 자주 발생한다며 모든 건 ‘천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홈스테이 숙소에서 구눙물루 국립공원까지는 약 600m 거리, 마을 구경 삼아 산책하는 길이 정겨운 산골 풍경 딱 그 모습이다. 띄엄띄엄 자리한 주택과 울창한 나무만이 시야에 담긴다. 국립공원이 전 세계에 알려진 시기가 1970년대 후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산골마을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발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다. 사라왁주 정부가 이곳 산과 주변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건 1974년의 일이다. 이후 1978년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과학 탐험대를 조직해 이곳에 파견했는데 이는 해외원정단에 의한 동굴 탐험의 첫 시작이었다.
이를 계기로 1980~1990년대에 걸쳐 영국과 미국 등의 국가에서 전문가로 구성된 새로운 탐험대가 꾸려져 거의 매년 이곳을 방문했고, 결과적으로 숨겨진 동굴을 발견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전 세계 탐험대에 의한 동굴 발견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 국립공원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열대 카르스트(석회암) 지역으로 손꼽힌다.

달리 보면 구눙물루 국립공원은 관광지보다 전문가를 대상으로 동굴과 열대우림 탐험의 연구장소에 더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사라왁주 정부는 공원의 90%, 동굴의 95%에 해당하는 면적을 오로지 연구 목적으로만 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관광객과 같은 방문객은 대중에 공개된 쇼 동굴 4곳만 방문이 가능한데, 이를 위해선 국립공원 사무소에서 허가증을 반드시 발급받아야 하고, 공원 가이드와의 동행도 필수적이다.
구눙물루 국립공원 입구에 조성된 산책로를 통해 정글 숲을 걷다 보면 오랜 세월 자연을 해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자 노력해온 이곳 사람들의 정성을 느끼게 된다. 수많은 희귀한 식물과 동물이 서식하는 곳, 일단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숨죽이며 나직이 교감을 시도해보았다.

자연의 경이로움이 동굴 속으로
일반인에 공개된 동굴은 디어(Deer), 랭(Lang), 윈드(Wind), 클리어워터(Clearwater) 총 4곳이다. 1984년 관광을 목적으로 동굴이 개방되어 매년 전 세계 국가에서 약 2만 5,000명의 방문객이 동굴을 찾고 있다.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동굴 투어 일정은 디어와 랭, 윈드와 클리어워터 두 개로 나눠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틀에 걸쳐 4곳의 동굴을 차례로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방문한 곳은 디어와 랭 동굴이다. 하루 중 오후에만 2회에 걸쳐 투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투어 예약은 국립공원사무실 또는 홈페이지(mulupark.com)를 통해 가능하다. 한 그룹당 인원은 10명을 넘지 않는다. 국립공원 소속 전문 가이드를 따라 열대우림을 통과하는 약 3km의 산책로가 디어와 랭 동굴 탐험의 시작이다.
가이드로부터 생물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1시간가량 산책로를 걷고 나면 그 끝자락에 휴게소처럼 보이는 건물에 닿는다. 디어와 랭 동굴 속에 들어가기 전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자 일몰 직전 행해지는 박쥐의 대이동을 관찰하는 장소다.

디어 동굴은 길이 2km, 높이 174m로, 대중에게 개방된 세계에서 가장 큰 동굴 통로다. 랭 동굴은 이보다 규모가 작고, 경이로울 정도의 다양한 종유석과 석순의 흥미로운 발견지로 알려져 있다. 일단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현실감을 곧장 잃는다. 약간 가상세계에 도달한 것 같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거대한 자연의 위용에 압도당하고 만다.
소름 끼칠 정도의 전율이 온몸을 적신다. 디어 동굴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대규모의 박쥐떼다. 이 동굴에는 12종에 속하는 200~300만 마리의 박쥐가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 저녁 사냥을 준비하기 위해 대이동을 시작한다. 수백만 마리의 박쥐가 나선형을 이루면서 동굴 밖을 나오는 모습은 마치 벌떼의 행렬과 닮아 있다. 화창한 날일수록 박쥐가 일으키는 나선형 궤적은 더 짙고 강렬한 기세를 내뿜는다고 한다.

윈드와 클리어워터 동굴 투어는 다음날 오전에 진행됐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나무배를 타고 강을 따라 동굴로 향했다. 물루 공항이 조성된 후 비행기가 이곳 마을의 주요 교통수단이자 운송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나무배가 유일했다. 현재도 선박을 이용해 주변 도시나 마을을 왕래하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고. 사라왁의 여러 민족 중 하나인 페난(Penan)족이 살아가는 바투분간(Batu Bungan) 강변 마을을 잠시 둘러본 뒤 약 30분 정도 달려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클리어워터 동굴은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동굴 중 하나다. 그 이유는 면적의 광대함에 있다. 총 길이는 200km 이상이다. 300여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가쁜 숨을 고른 뒤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 본 디어와 랭 동굴의 경이로움을 단숨에 잊을 만큼 동굴 내부의 광대함이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 동굴 통로는 24km에 달한다. 이에 대한 동굴 탐험가의 연구조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어 길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초록빛 세상, 열대우림 속을 홀로 걷다
구눙물루 국립공원 탐방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문 가이드와의 동행이 필수인 데다 일반 관광객에 개방된 장소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곳 여행은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주축을 이루는데, 투어 프로그램은 장소와 가이드 여부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동굴 탐방, 산악 트레킹, 열대우림 트레킹이다.
전문 가이드가 중심으로 진행되는 동굴 탐방, 산악 트레킹과 달리 열대우림 트레킹은 국립공원 입장권만 소지하고 있으면 가이드 없이 홀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단, 출발하기 전 국립공원사무소 직원에게 열대우림 트레킹의 목적지인 트리탑타워나 파쿠폭포 방문계획을 사전에 미리 알려야 한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룹에 섞여 무리 지어 걸었던 열대우림 산책로를 홀로 차지하고선 트리탑타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소리, 지저귀며 합창하는 새들의 노래, 이따금씩 등장해 산책로를 함께 걷는 도마뱀.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벌레들에 신경이 쏠렸지만 나를 향해 열린 정글 숲에 오감을 열었다. 그렇게 열대우림은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무성한 숲 사이에 조성된 트리탑타워에 오르는 길은 꽤 아찔하다. 좌우를 살피다가 포기하고선 고개를 떨구고 계단만 뚫어져라 응시하며 30m 높이의 타워 전망대 꼭대기에 올랐다. 다양한 종의 새를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 공간에서 작은 창문 틈에 두 눈을 바짝 붙인 채 한참을 얼음자세로 새를 살폈다. 그러는 사이 사우나 시설에 갇힌 듯 온몸에서 줄줄 차오르는 땀을 한 바가지 정도 쏟아내고 나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쾌함이 뇌를 자극했다. 반신욕을 마친 기분과 맞먹었다.
눈 앞에 펼쳐진 초록빛 세상으로부터 마침내 구원을 얻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살면서 이보다 더 절실하게 자연의 소중함이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다시금 열대우림 속을 헤쳐 파쿠폭포로 향했다. 자연을 존중하며 걷는 길은 순리를 깨우치는 과정으로 귀결되었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75호(25.04.15)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