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스러운 세상에 필사로 정신을 가다듬는 사람들이 늘면서 관련서들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온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디지털 피로 속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25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필사 관련 출간 종수가 작년부터 증가 추세다. 2022년 61권, 2023년 57권에서 작년 한 해 동안 82권으로 전년 대비 43.9%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벌써 25권(2월 16일 기준)이 출간됐다. 특히 2030세대가 필사 유행을 이끌고 있다. 연령별로 올해 필사 관련 책을 구입한 비중을 보면 20·30대가 52.1%를 차지했다. 20대 비중이 확연하게 늘어 작년 8.8%에서 올해 21.3%로 증가했다. 30대 비중은 작년 28.6%에서 올해 30.8%로 소폭 증가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필사 열풍 이유는 우선 훌륭한 문장을 베끼면 글쓰기를 연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여전히 높은 문장력·어휘력이 요구된다. 베스트셀러인 필사 책 제목만 봐도 이 같은 수요가 읽힌다.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 등이 있다. 이 책들은 왼쪽 장에 박완서, 김애란부터 헤르만 헤세, 알랭 드 보통까지 국내외 문학인들의 다양한 글을 싣고, 오른쪽 장은 빈 공간으로 편집된다. 필사할 때 책이 잘 펼쳐지도록 사철 제본되거나 필기감 좋은 모조지로 구성된다. 아날로그적 행위인 필사를 통해 디지털 시대에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적 요인도 작용한다. 조용히 한 글자씩 쓰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단단해진다. 필사노트를 따로 장만해 여기저기서 내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수집한 경우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봤을 때 당시 나의 감정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2030세대, 특히 20대가 불안을 해소하고 마음의 안정감을 찾기 위해 필사를 한다"며 "손글씨로 문장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급도 이에 발맞춰 다양한 분야에서 필사 책이 나오고 있다. 단순히 문학작품의 필사를 넘어서 최근에는 헌법, 가사, 힐링 문장 필사집까지 출간되고 있다. 최근 정세와 맞물린 '헌법 필사'가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헌법 전체를 조문 순서대로 제시하고 따라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필사책'은 민주주의·정치·인권·시민의식·주체적 삶의 가치를 다룬 글귀와 명언을 담고 있다. 필사하면서 민주주의 의미를 천천히 꼽씹을 수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가사 필사집도 인기다. 한 편의 시 같은 노랫말을 직접 따라 쓰며 그 의미를 곱씹는다. '아이유 가사 필사집'에는 아이유의 노래 63곡, 'DAY6 가사 필사집'에는 DAY6의 노래 97곡이 수록돼 있다. 책 속 QR코드를 통해 노래를 들으며 필사할 수 있다. '김광석 노래 필사하기'와 '태연 가사 필사집'도 출간을 앞두고 예약 판매를 시작했다.
독자의 마음을 다독였던 책을 필사 노트 버전으로 재출간한 경우도 있다. 법륜 스님의 문장을 모은 '지금 이대로 좋다 필사 노트'와 심리상담사인 고은지 저자가 쓴 '오늘도 잘 살았네' 속 문장들을 직접 적어보는 필사 에디션이 잘 팔리고 있다. 이 책들은 필사는 손으로 하는 명상이라며 긍정 확언을 통한 정신력 증진을 강조한다.
필사를 위한 필기구 판매 역시 증가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29CM는 올해 들어(1월 1일~2월 12일 기준)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이 전년 대비 75% 증가했다고 밝혔다. 카테고리별로 보면 고급 만년필, 볼펜, 연필 등 필기구는 2.4배 늘었고 다이어리·플래너는 64%, 노트류는 43% 이상 거래액이 증가했다.
[박윤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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