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를 초월한 지혜와 철학이 담긴 글 속에서 필자에게 가장 선물 같은 주제는 '설해목(雪害木)', 쌓인 눈에 꺾인 소나무를 표현한 대목이다. 글은 고즈넉한 저녁에 찾아온 손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더벅머리 학생 하나가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을 찾아왔다. 학생 손에 들린 편지엔 '스님께서 이 망나니를 사람 좀 만들어 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잔뜩 주눅 든 학생에게 노승은 말없이 저녁 식사를 차려주고, 발 씻을 더운물을 직접 내주었다. 훈계도, 호통도 없이 다사로운 손길만이 있었다. 그 순간 학생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법정 스님은 '설해목'의 의미를 더한다. 겨울 깊은 밤, 수척해진 산중에 나무들이 꺾이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소나무들이 쌓인 눈에 꺾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뿐사뿐 내린 보드라운 눈에 단단한 나뭇가지가 꺾이고 만다. 딱딱하고 강한 것이 부드러움 앞에서 무너지는 그 장면이 들려주는 역설의 진실이다. 결국 더벅머리 학생을 달라지게 한 것은 백 마디 훈계, 천 마디 좋은 말이 아닌 그저 다사로운 손길일 뿐이었다. 바닷가의 모난 조약돌을 부드럽게 다듬어낸 물결처럼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자연보다도 쉽지 않다. 조직사회와 경영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잘 이끄는 이를 "카리스마 있다"고 부른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이 표현을 오해한다. 단호하고 저돌적인 사람을 "카리스마 있다"고 잘못 표현한다. 본디 카리스마의 의미는 '힐링 능력'이다. 사람을 제압하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힘. 그것이 진짜 카리스마다.
우리는 때때로 관계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단하게 무장한다. 약함을 감추고, 단호함을 무기로 삼는다. 하지만 그런 강함은 오히려 쉽게 부러진다. 고집은 대화를 막고, 냉정함은 마음을 얼리며, 지나친 힘은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 반면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손길,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그 존재들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삶을 조금씩 움직인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안에서 진짜 힘은 단단함이 아닌 부드러움 속에 있다. 부드러움은 포기나 물러섬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진정성이 담긴 소통의 방식이다.
겨울을 이겨낸 소나무는 단단한 것이 아니다. 바람에 몸을 숙이고 다시 일어선 '부드러운 나무'다. 소복이 쌓이는 부드러운 눈처럼 말이다.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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