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고요를 가르며 움직이는 물체가 보였다. 눈에 푹푹 빠지며 간신히 몸을 가누는 여우였다. 한참 만에 현관을 가로질러 뒤꼍 숲으로 긴 꼬리가 사라졌다.
아늑한 고립이 찻물처럼 고이는 동안, 긴 꼬리의 행방이 자꾸 궁금해졌다. 텅 빈 풍경 속에 작은 생명 하나가 남긴 흔적을 찾듯,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냄비에 무와 양파를 깔고 재워둔 갈비를 얹었다. 잘 익은 물김치를 꺼내고 파르스름한 렌틸콩밥을 준비했다.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 다륵 다르륵 눈삽 소리와 기계 소리가 집집이 울렸다. 윌리엄네, 옆집 쌍둥이네 서로 손을 높이 흔들며 인사를 나눈다. 겨울 동안 누리는 고된 즐거움 중 하나다.
금이 간 접시를 꺼냈다. 라벤더 꽃과 나비 그림이 예쁜 그릇이다. 아까 발라 둔 고기 부스러기를 담았다. 꼬도독 소리 나도록 발라 먹던 갈비도 살점을 남겼다. 행여 해로울까 봐 물에 헹구었다. 어둑해지기를 기다려 뒤꼍으로 나갔다. 부지런한 눈삽이 향나무 앞까지 길을 터놓았고, 나는 나무 밑에 조심스럽게 접시를 내려놓았다.
커튼 뒤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찍이 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멈춰 서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조금씩 다가갔다. 목을 길게 늘여 냄새를 맡다가 재빨리 물러서기를 여러 차례, 이리저리 살피며 긴장을 놓지 않았다. 문득 청년들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하지만 자꾸 거절당하는 현실에 마음을 다치고 불안해하는 젊은이들, 이마 끝에 날 선 바람을 품고 사는 그들의 모습이 겹쳤다.
한참을 망설이던 여우가 용기를 냈는지 후다닥 한입 물고 달아났다. 마음 같아서는 창문을 열고 "여우야, 겁낼 것 없어. 널 위한 밥상이야"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쪽지라도 써 놓을까, 혼잣말하며 물러서는 내게 '당신, 여우 나라 글도 알아?'라고 되묻는 소리가 웃음 섞여 들렸다.
며칠이 지나자 여우는 조금씩 여유로워졌다. 주변을 살피긴 하지만 조용히 밥을 먹고 천천히 돌아갔다. 불안으로 종종거리던 발자국이 줄어들고 경계심도 저만큼 물러났다.
요즘 밖에서 고기를 먹는 날이면 뼈와 남은 것을 싸 온다. 친절한 주인은 "오늘도 여우 몫이 필요하죠?" 하며 따로 챙겨주기도 한다. 다만 자연적 생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고 양념 없는 생고기나 뼈를 준비한다. 횟수도 나름대로 조절하고 있다.
도그우드 꽃이 한창인 이곳, 뽀얀 목련이 집집이 환하다. 숲의 주인이던 여우나 들짐승에 빚을 갚아 가는 마음이랄까. 언젠가 여우가 아기들을 조르륵 데리고 온다면 나는 조금 더 큰 접시를 준비해 둘 것이다. 태양도 다산을 했는지, 오늘따라 창가 햇살들이 유난히 복실거린다.
[김인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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