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부터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커피를 마셔도 졸음은 여전했고, 스마트폰을 멀리해도 집중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전에 읽었던 책을 꺼낸다.
존 윌리엄스의 장편 '스토너'. 기록을 보니 10년이 조금 더 지난 2015년 처음 만났다. 윌리엄스의 다른 소설들도 찾아 읽었다. '아우구스투스'는 2016년 9월이었다.
이리도 좋은 글들이 왜 오랜 세월 무명의 무덤에 묻혀 있었을까. 어쩌면 작가의 이름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싶다. 독서장에도 적혀 있다. "참 좋다. 내 이름만큼 흔한, 그 이름 때문에 묻혔던 것이겠지만." 존이라면 한국에서는 철수나 영태쯤일까.
이름,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본질은 아닌데 본질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마다 이름으로 불리면서 자기를 조금씩 바꾸고, 어느새 이름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간다. 너무 흔해 이름값이 없다고 투정할지언정 끌어안고 평생 같이하기 쉽다.
본질은 이름을 뚫고 나온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로미오를 바라보며 말한다. 장미는 장미의 이름이 아니어도 향기가 난다고. 무명의 '스토너'가 전 세계적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것도, 흔한 이름의 작가가 써내려간 '이름 없는 인생'의 진수, 본질이 비로소 발견된 덕은 아니었을까.
세상은 생각보다 이름을 많이 따진다. 이름에 값을 매기기도 한다. 어느 학교 출신인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명함 위에 어떤 직함·직책이 적혀 있는지. 개인도 커리어도 '브랜드'라며 투자하고 관리하라고도 한다. 심지어 신념조차도 그렇다.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장에서, 소셜미디어 닉네임까지, 우리는 쉴 새 없이 자기 이름을 판다. 몽테뉴가 에세1권 제46장에 적었듯 "인간이란 덕보다는 영광에 목마른 게 사실"이기 때문이겠다.
이름이 전부인 세상은 삭막하고, 이름이 아무것도 아닌 세상도 허무하다. 어디로 치우쳐도 소외가 생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 김수영은 "이름 팔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값싼 광대의 근성"이라고 했다. 전집2 산문편 일기 초에 적혀 있다.
이름에서 자유롭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편이 좋다고 나는 믿는다. 이름 없는 가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되, 그걸 '누구의 것'이라고 할 줄 아는 용기를 갖는 것. 이름이 흔해서, 무겁거나 가벼워서, 혹은 너무 특별해서 고민이라면 그조차도 '나의 역사'라고 인정해버리는 것, 나답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2024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김복희 시인은 이렇게 묻는다.
"세상에서 소리를 하나……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답은 시 제목에 미리 적어뒀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라는.
'나답게 만든 나의 이름'들을 서로에게 불러줘야 일이 생긴다. 일이 커진다.
이현호의 시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았다'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아무도 아무도를 부르지 않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 지옥과 지옥은."
스물일곱이라면 한창 이름이 만들어지는 때다. 그 이름으로 평생 먹고살 수도, 버리고 새로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렵다면 두려움 그대로 끌어안고, 설레면 설렘대로 씩씩하게 밀고 나가면 되겠다. 흔한 이름이든, 별난 이름이든, 결국 이름이 빛나는 때는 주인이 자기 이야기를 꾹꾹 담아냈을 때니까.
"너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제아무리 시답잖은 질문처럼 보여도, 그 한마디가 시작이 된다.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말기를, 너무 폼나게 꾸미려 애쓰지도 말기를. 겸손한 듯 당당하게, 이름을 내 것이다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스물일곱 혹은 이후의 어느 날에도, 바로 그 이름이 너를 증명할 것이니.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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