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우리의 금속활자는 문화재의 관점에서 위대했을지언정, 경제적 혁신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인쇄 기술이라는 혁신의 불꽃이 오직 지배계층 몇몇을 위해서만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발명은 있었으나 상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반도 유일의 출판 기관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왕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강력한 검열기관이었지요. 어떤 지식을 담을지, 무엇을 찍어낼지, 몇 부를 출판해 배부할지를 조정이 정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인쇄술은 나날이 개량돼 갔지만 왕실은 실제 행정과 유교 교육에 꼭 필요한 책만 찍어냈습니다. 유교에 반하는 지식의 유통을 막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는 욕망으로 똘똘 뭉친 상인이 없었습니다. 푸스트와 쇠퍼가 없었습니다. 새 책이 없다는 건, 새 지식이 없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사회의 혁신이 없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책을 숭상하는 그들의 태도도 인쇄 혁명을 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책은 고귀한 가치와 불변하는 진리의 전달자였습니다. 책을 읽는 건 가장 신성한 행위. 저잣거리의 장사치, 천한 농부의 자식 따위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요. 강제적 근대화가 이뤄지기까지 한반도에서 새로운 책이 나오지 않은 배경이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저는 상상합니다. 조선 조정이 표음문자 한글과 금속활자 인쇄술을 기반으로 무수히 많은 책을 인쇄했으면 어땠을까요. 지식이 민중의 언어로 전파되고, 수많은 혁신 기술이 서로 교미하면서 새끼를 낳지 않았을까요. 과학, 문화, 농업, 상업의 지식이 국부로 연결되지 않았을까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이어지는 망국과 식민지배통치 과정에서 적어도 아주 무기력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사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발명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시장화(Marketing)였다고. 정보기술(IT) 혁명기인 현대사회만 봐도 그렇습니다. MP3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 MP맨은 아이팟보다 먼저 시장에 나와 대중의 귀를 즐겁게 해줬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뒤흔든 건 애플의 아이팟이었습니다. 발명의 속도보다 대중의 수요와 감각을 읽는 마케팅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싸이월드도 페이스북보다 앞섰지만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시장에 닿지 못해서였습니다. 더 많은 소비자의 마음을 훔치지 못해서였습니다.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성경, MP맨과 아이팟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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