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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르술라…그러므로 내 죽음은 순교 [배철현의 ‘카라바조로 보는 인생’]

“당신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 배철현 더코라
  • 기사입력:2025.07.19 21:00:00
  • 최종수정:2025-07-19 01: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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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성 우르술라의 순교, 카라바조(1571~1610년), 유화, 1610년, 178㎝×154㎝, 인테사 산파올로 은행 수집 작품, 나폴리, 팔라쪼 제발로스 스틸리아노 갤러리.
성 우르술라의 순교, 카라바조(1571~1610년), 유화, 1610년, 178㎝×154㎝, 인테사 산파올로 은행 수집 작품, 나폴리, 팔라쪼 제발로스 스틸리아노 갤러리.

카라바조의 인생은 말년에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인과응보의 당연한 결과였다. 신은 그에게 인간의 심리를 묘사할 수 있는 천재성과 더불어 자신의 욕망과 분노를 조절할 수 없는 성급함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공평하다. 결정적인 사건은 1606년에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그는 자신의 팜 파탈이며 영감을 주었던 창녀 필리데에 빠졌다. 그가 필리데의 포주 라누치오 토마소니를 만나는 것은 운명적이었다.

카라바조는 이 포주를 죽이고 로마를 떠나 도망치는 삶을 살았다. 로마 교황의 치외법권 지역인 몰타, 시실리, 나폴리를 전전한다.

그는 유럽에서 건너온 성요한 사제들이 자치행정구역을 만들어 거주했던 몰타섬으로 잠입했다. 그는 몰타에서 사제들 환심을 사려고 이들이 신봉하는 성요한과 통치자 알로프 데 위나쿠르트 초상화를 그렸다. 그 대가로 기사작위를 획득했다. 성요한 사제단의 탄원이 있다면, 교황 사면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난폭한 성격은 그를 다시 궁지로 내몰았다. 그가 성요한 사제들을 모욕하면서 갈등이 빚어졌고 이번에는 시실리섬으로 도망간다. 시실리에서도 자신이 교황의 개입으로 화가로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 부활을 꿈꾸며 ‘나사로의 부활’이나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목동들’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는 다시 로마로 갈 수 있는 배가 있는 나폴리로 이주한다.

성요한 기사단 단원인 로에로와 그 동료들이 카라바조가 나폴리에서 로마로 도망칠 준비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정보를 입수한다. 카라바조는 1609년 10월 여전히 교황의 사면을 기대하며 나폴리의 한적한 숙소 오스테리아 델 체릴리오에 있었다. 성요한 기사단들은 이 숙소에서 카라바조를 공격한다. 카라바조의 두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엔 큰 칼자국이 남겨졌다. 그뿐인가. 한쪽 눈은 영원히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회복을 위해 오랫동안 잠복에 들어간다.

이 같은 카라바조 말년의 드라마는 그가 남긴 작품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드러난다. 물감의 거칠기는 그가 얼마 전 끔찍한 공격을 받아 얼굴이 베이고 거의 장님이 된 시야 때문이었다.

그가 부상으로부터 겨우 회복하면서 유작 두 편을 남긴다. 1610년 여름에 그린 ‘베드로의 부인’과 죽기 한 달 전에 그린 ‘성 우르술라의 순교’다. 그의 마지막 작품 ‘성 우르술라의 순교’는 다른 그림처럼 성서가 아니라 중세 전설에서 주제를 가져왔다. 성서 그림들이 그에게 사면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혹은 이제 자신이 성 우르술라처럼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까닭인가?

‘성 우르술라의 순교’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 널리 읽힌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가 기록한 ‘황금전설’이란 책에서 처녀 일만천명을 데리고 독일로 순례를 떠난 성 우르술라를 그렸다. 우르술라는 라틴어로 ‘작은 곰’이란 의미다. 그녀는 아마도 4세기경 인물로 로마가 정복한 브리튼(영국) 출신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중해와 유럽은 혼란기였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유목 민족 훈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훈족은 게르만족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 멸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훈족은 아마도 란계 스키타이인과 흉노족의 혼혈일 것이다.

이 전설에 의하면 우르술라는 일만천명 처녀를 이끌고 순례길을 떠났다. 그녀와 순례자들은 오늘날 독일 쾰른에서 훈족을 만난다. 훈족은 이 처녀들을 보고 배고픈 사자가 양떼를 만난 것처럼, 겁탈한 후 참수했다. 그러나 대장인 우르술라만은 죽이지 않았다. 훈족의 왕은 우르술라의 미모에 반하여 청혼한다. 우르술라가 이 청혼을 거절하자, 그는 지근거리에서 그녀의 심장에 활을 쏴서 죽였다.

이 장면을 묘사한 전통적인 그림은 수많은 병사가 처녀들을 죽이는 학살 장면을 담았다. 카라바조는 정반대로 그린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하고 우르술라의 순교 장면을 자신의 삶에 대한 끔찍하고 내밀한 의례로 묘사했다. 그는 이 비극적인 순간을 담기 위해, 특유의 클로즈업과 극적인 조명을 설치했다. 나폴리 길거리에서 모델들을 수배했는데, 세상 풍파에 찌든 얼굴과 피부, 그리고 더러운 손톱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검은 고동색 천으로 된 장막 앞에 세웠다. 이 끔찍한 우르술라의 순교를 바라보는 공포에 질린 구경꾼이며, 또 다른 우르술라로 자신을 그려 넣었다. 훈족에 의해 비참하게 희생된 우르술라를 자신과 일치시켜, 자신이 맞이할 죽음은 순교라고 선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왼편에 활을 쏜 자가 훈족의 왕이다. 그는 지근거리에서 활을 막 발사했다. 왼손에 쥔 활을 내려놓는 찰나에 활은 우르술라의 심장에 박혔다. 그는 왕으로 붉은색 외투를 입고 커다란 터번을 썼다. 붉은색 외투는 당시 교황과 주교들의 상징이고 웅장한 터번은 로마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는 귀족을 상징한다. 오랜 야전 생활로 그의 얼굴과 손은 흉터투성이다. 가슴엔 훈족을 상징하는 구리색 사자 브로치를 달고 있다. 그는 우르술라에게 활을 쏜 후 자기가 먼저 놀란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던 것일까. 그는 고개를 화살이 안착한 우르술라 쪽으로 돌린다. 차마 이 처참한 광경을 볼 수 없어 눈을 거의 감았다. 그는 겉으로는 위엄이 있고 용맹스럽지만, 한없이 약한 존재다.

화살을 심장에 맞은 우르술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시선과 두 손의 모습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녀는 성적 폭행의 희생자로 임산한 모습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푼 배를 붉은색 천으로 가렸다. 그녀는 이제 이 붉은 옷을 내려뜨리고 자신이 원래 입었던 소박한 무명옷을 드러낸다. 훈족 왕이 쏜 화살이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우르술라는 화살로 난 상처에 두 손을 갖다 댄다. 그리고 양손의 네 손가락으로 그 부위를 더 벌리고 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고귀한 죽음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태시키고 있다. 이 죽음은 거룩한 뜻을 이루려는 순교다. 우르술라 옆에 있는 그녀의 여종은 훈족왕과 우르술라 사이를 오가는 귀신처럼 묘사되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그리스도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훈족 왕의 화살을 저지하려 시도했지만 늦었다. 그림의 맨 오른쪽에 있는 빛나는 검은 갑옷과 투구를 쓴 군인은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우르술라를 붙잡기 위해 몸을 구부리고 있다.

카라바조는 자신에게 죽음이 이 화살처럼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자신을 이 그림에 그려 넣었다. 우르술라 바로 뒤에 다 죽어가는 창백한 얼굴을 한 사람이다. 그는 저 너머, 그림 밖 허공을 바라본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지, 로마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머리는 마치 우르술라의 두 번째 머리처럼 그녀의 몸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눈은 반쯤 감겼고 입은 벌려져 있다. 이것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자화상이다.

카라바조는 이 유작에서 자신을 우르술라의 제2의 자아로 그렸다. 파란만장한 삶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그림이다.

사진설명

[배철현 더코라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8호 (2025.07.16~07.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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