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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을수록 ‘쾌감’ 느꼈던 위대한 철학자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42) 장 자크 루소의 사생활

  •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 기사입력:2025.06.21 09:00:00
  • 최종수정:2025-06-20 16: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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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장 자크 루소의 사생활

“엉덩이를 처음 맞았을 때,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분명 수치심과 고통을 느껴야 하는 대목인데, 외려 짜릿하고 야릇한 감정이 들었다. 매를 든 서른 살 가정 교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열 살도 안 되는 제자가 맞을수록 희열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다. 한 번 더 때려달라고, 매를 놓지 말라고 사정하는 그를 보면서 여선생님은 매질을 멈췄다. 어린 학생 표정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소년은 그때의 피학적 경험을 평생 동경하며 살았다. 거만한 여주인의 발에 짓눌려 복종하고, 쳐달라고 애원하면서 쾌락의 끝을 보고 싶었다. ‘이색적 취향’을 고백할 자신은 없었기에 나이 많고 원숙한 여인들과 연애하며 대리만족을 느낄 뿐이었다. 소년의 삶은 성적 일탈로 가득 찼다.

성적 방종은 인생 패망이라는 도덕 명제는 그를 교묘히 비켜갔다. 그가 대철학자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피학 성향, 이른바 ‘마조히즘’을 품고 있던 남자의 이름은 ‘장 자크 루소’다. ‘사회계약론’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위대한 사상가. 민주주의 세계의 거대한 기둥을 세운 그였지만, 루소의 삶을 지탱한 건 성욕이라는 또 다른 벽돌이었다.

일러스트 : 강유나
일러스트 : 강유나

자신 키워준 유부녀에게 맞으며 ‘희열’

낮에는 ‘교양’을, 밤에는 ‘쾌락’을 배운 루소

갓 태어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따뜻한 ‘엄마의 품’일 것이다. 루소에겐 없던 것이었다. 어머니 테오도라가 루소를 낳은 지 9일 후에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170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 제작자인 아이작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 그는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를 향한 끝없는 그리움을 그리며 자랐다.

일에 치여 살다시피 한 아이작은 루소를 가정 교사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서른 살 여인 라 르시에르가 그의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루소에게서 다소 이상한 취향을 발견한다. 어린아이가 맞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루소가 말년에 쓴 ‘고백록’에는 그가 체벌당했을 때 느낀 성적 쾌락에 대한 묘사가 적혀 있다. “서른 살 젊은 여성에게 받은 벌이 내 남은 일생의 욕망과 열정을 좌우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가족과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는 재혼 뒤 루소를 방임했고 루소를 유명 조각가 문하생으로 보냈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루소는 견디지 못했다. 밥 주고, 재워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요량으로 그는 먼 길을 떠났다. 대책 없이 떠난 길이었지만, 운명은 그를 한 여인에게로 이끌었다. 프랑스 사보이 지역에 거주하던 루이즈 드 바랑스 남작 부인이었다. 30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가톨릭에 신실한 여인. 오갈 곳 없는 청년들을 가톨릭 전사로 양성하는 걸 소명으로 여기던 인물이었다.

성(聖)스러운 목적 이면엔 또 다른 성(性)적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남편과 별거하던 그녀는 젊은 사내를 들여 성욕을 풀었다. 잘생기고 어린 열여섯 살의 루소는 그녀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던 바랑스 부인은 어느새 루소의 침실로 들어왔다. 처음엔 당황한 루소도 어느새 그녀가 주는 쾌락에 빠지고 있었다. ‘어머니이자 연인’이라는 독특한 연애의 시작. 낮에는 철학·역사·언어· 문학 등 귀족이 배워야 할 모든 교양을 습득했고, 밤에는 쾌락의 시간을 가졌다. 원숙한 바랑스 부인은 침대에서 루소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는 바랑스 부인 밑에서 자신의 글쓰기 재능과 사고의 창의성을 깨달았다. 19세기 역사학자 쥘 미슐레는 “루소의 천재성은 바랑스 부인이 빚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왕성한 성욕은 루소 하나로 채워지지 않았다. 루소는 27살 되던 해에 그녀를 떠났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맞을 때 희열을 느끼는 피학적 성 취향을 가졌었다. 그의 마조히즘, 그리고 친구의 애인을 향한 성욕은 그가 저술한 ‘고백록’에서도 전해진다.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맞을 때 희열을 느끼는 피학적 성 취향을 가졌었다. 그의 마조히즘, 그리고 친구의 애인을 향한 성욕은 그가 저술한 ‘고백록’에서도 전해진다.

친구의 여자친구까지 탐한 루소

문란한 사생활과 평소 철학 사이 ‘괴리’

파리로 떠난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지적 성장을 경험한다. 루소가 보기에 파리는 발달한 문명을 지닌 곳이었으나 그만큼 타락한 인간으로 그득한 곳이었다. 푸르른 자연이 가득한 고향 스위스와는 대비되는 곳이었다. ‘진보는 타락과 동의어’라는 그의 급진적 주장은 볼테르·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1757년 루소는 파리라는 문명에서 자신을 격리했다. 파리 북쪽에 있는 몽모랑시숲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귀족 부인 데피네 부인이 그를 경제적으로 후원해준 덕분이었다. 루소의 친구이자 계몽철학자였던 디드로,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생랑베르와 친교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했다. 푸르른 나무로 가득한 이곳에서 그는 또 한 번 강렬한 사랑의 충동을 느꼈다. 소피라는 여인이었다. 루소의 친구 생랑베르의 연인이기도 했다. 문명이 그어놓은 금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천성 때문이었을지. 루소는 생랑베르가 입대를 한 사이 소피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자주 숲속으로 사라진다는 소문이 생랑베르에게 닿았다. 루소의 친한 친구였던 디드로도 더 이상 루소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루소는 “결코 육체관계는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세상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나무가 커튼을 친 둘만의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야릇한 침실이 된다는 걸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의 말을 비꼬아 듣기도 했다. 루소를 향한 비난이 일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문란한 사생활과 평소 말했던 철학과는 다른 그의 오염된 삶의 행적이 비난의 화살이 되어 쏟아졌다.

치정에 지친 루소, 지적 여행 떠나다

결과물은 ‘사회계약론’…대혁명 촉발

계몽주의자들과의 다툼으로 루소는 더욱더 깊이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해갔다. 그의 정치 철학의 정점으로 통하는 ‘사회계약론’이 출간된 것도 디드로·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다툰 이후였다.

비난, 다툼, 치정. 그 모든 것에 지쳐 있을 때 루소는 다시 지적인 여행을 떠났다. 자신의 내면으로였다. 어릴 적 선생님에게 맞았을 때 느꼈던 희열, 원숙한 여인에게서 느꼈던 육체적 쾌락, 친구들과 멀어지게 만들었던 소피와의 짧은 정신적 교감까지. 모두 한 책에 담았다. ‘고백록’이었다. 인생을 오직 아름답게만 편집하려는 고상한 지식인들과 달랐다. 그 표현이 얼마나 강렬한지. 아직도 책장을 뚫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를 부드럽게 눕히고, 나는 그녀의 숨결과 함께 깊이 빠져들었다… 우리는 신음도 없이, 마치 한 존재가 된 것처럼 조용히 사랑했다.” (‘고백록’ 中)

흉금을 열고 자신의 모든 걸 고백한 그는 ‘고백 문학’의 한 전기를 마련하고 1782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육체는 사멸하지만, 정신은 불멸했다. 국가가 가진 모든 권력은 국민의 일반 의지로부터 나온다는 루소의 생각은 혁명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매 맞으면서 쾌감을 느끼던 아이가 부른 나비효과였을지. 민주주의는 성(聖)과 속(俗)이라는 바퀴로 굴러가는 것이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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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5 (2025.06.25~07.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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