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영화 ‘트로이’의 끝 장면에 고대 트로이 왕국의 마지막 왕인 프리아모스가 그리스의 침략을 받아 불타는 성(城)들을 바라보며 애통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생 쌓아올린 업적과 성과가 잿더미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노인의 슬픈 눈과 처량한 뒷모습, 이후 적에 의해 죽음을 맞는 장면이 가슴 아프다.
이것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지난 15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돼 가지고 사법부를 계속 흔든다면 또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나서였다. 그 자리에는 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도 함께 했는데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민주주의를 철저히 악용하고 있다”고 했다. 군부 독재와 싸우다 고문으로 장애를 얻고, 평생 트라우마를 겪는 많은 자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민주화를 이뤄냈다면서 정치권 상황에 탄식했다.
![후보 단일화 촉구 단식농성 (서울=연합뉴스) 김무성 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상임고문단이 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대선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유준상 상임고문, 김무성 상임고문. 뒷줄 왼쪽부터 신경식, 김동욱, 김종하, 목요상, 권해옥, 유흥수 고문. 2025.5.7 [국민의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utzz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https://wimg.mk.co.kr/news/cms/202505/20/rcv.YNA.20250507.PYH2025050720260001300_P1.jpg)
이들 모두 더불어민주당의 대법원장 겁박과 사법부 흔들기를 놓고 국가원로로서 대단히 화가 난듯하다. 민주주의 최고 보루인 사법부마저 농락하며 대한민국이 쌓아올린 민주화 성과를 마치 잿더미가 된 트로이 성처럼 만들려는 시도에 작심한듯 했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전력을 훈장처럼 달고 떠드는 민주당 사람들도 두 노장이 민주화 투쟁을 위해 다시 거리에 나선다고 했을 때 긴장하지 않았을까. 또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겨온 민주화운동의 서사가 망가져가고 있는데 대해 그들도 속으론 자괴감을 느끼진 않을까. 물론 그래주기를 바라는 개인 바람일 뿐, 권력과 집권욕에 도취된 자들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작금의 상황을 보면 다수당이 국회를 넘어 정부를 차지하고 내친김에 사법부까지 장악하려는 행보에 우리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있는지 위기감이 든다. 부끄러운 과거 일로 잊혀지려 했던 ‘계엄’이 지난해 말 다시 등장해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에 오점을 남긴 것처럼 민주당의 잇단 사법부 겁박 역시 위험하다.
게엄 사태는 기존 권력자를 탄핵시켜 바로잡았지만 초유의 사법부 겁박은 어쩌면 민주당 집권 후에도 지속돼 삼권분립에 영구 장애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훨씬 위태롭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주 유세에서 대법원을 겨냥해 “깨끗한 손으로 (판결)해야 한다”고 했다. ‘깨끗한 사법부’는 집권 시 개혁을 명분으로 물갈이 의도로도 읽힌다. “내란 수괴뿐 아니라 2·3차 내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찾아내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말에는 판사들 역시 내란 동조범이 될 수 있다는 위협마저 내포돼 있다.
정부와 국회 권력이 하나가 되면 법원은 압박감을 느껴 그냥 놔둬도 쪼그라든다는 것은 정치학 논문에도 나오는 현상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5대 악법’에 더해 일명 ‘왜곡 재판 방지법’으로 판·검사를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법률 개정안도 몰아붙인다. 서슬퍼런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도 최소한 겉으로는 이렇게 집요하지 않았고, 대법원장을 국민 앞에서 동네북처럼 공개 망신 주지도 않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민주화운동의 훈장이 부끄러운 장식물이 돼가고 있다.

오죽했으면 정계를 떠난 자들이 노구를 이끌고 다시 민주화 투쟁에 나선다고 했을까. 청춘을 바쳐 얻어낸 민주주의가 인생 말년에 원점으로 돌아가 망가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느끼는 서글픔도 크다. 온국민이 피땀 흘려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의 자긍심이 무너지고 있어서다. 중국의 추격과 미국발 관세 전쟁으로 한국 산업의 미래는 점치기 어렵고, 민주화는 내부 자중지란으로 남미와 아프리카 후진국 사례를 거론하는 지경이 됐다.
곧 현실이 될지 모를 삼권통합이 우리가 어렵게 쌓은 민주주의 공든탑을 트로이의 성처럼 불태우지 않을까 두렵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도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김병호 논설위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