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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 나라 선수들이 펼친 명승부 [정현권의 감성골프]

  • 정현권
  • 기사입력:2025.04.25 21:00:00
  • 최종수정:2025.04.25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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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4일(한국시간)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GC)에서 열린 제89회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연장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한 로리 매킬로이가 챔피언의 상징인 그린 재킷을 입고 트로피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UPI연합)
지난 4월 14일(한국시간)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GC)에서 열린 제89회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연장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한 로리 매킬로이가 챔피언의 상징인 그린 재킷을 입고 트로피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UPI연합)

“마스터스 89년 역사상 가장 큰 붕괴 위기를 딛고 자신을 괴롭혀온 유령과 정면승부를 벌여 이겼다.”

지난주 마스터스에서 로리 매킬로이(36∙북아일랜드)의 우승에 글로벌 스포츠 매체 ‘디 애슬레틱’이 날린 헌사이다. 저스틴 로즈(45∙잉글랜드)와 연장전까지 들어간 이날 경기는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이 펼친 명승부였다.

국내외 사정으로 어느 때보다 힘겨워하는 모국 영국에 전 세계 이목이 집중돼 모처럼 기쁨을 선사했다. 브렉시트(Brexit) 이후 바람 잘 날 없이 온 나라가 뒤숭숭한 영국이다.

국명(United Kingdom)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원래 왕국 연합체이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구성된다. 종주국은 잉글랜드이다.

골프, 축구 같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영국을 사용하지 않고 각각 이들을 국명으로 사용한다. 남아공에서 태어난 로즈는 영국인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잉글랜드 국명을 사용한다. 매킬로이는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표기한다.

특이하게도 독립국 아일랜드 골프협회는 영국령 북아일랜드 골프협회와 통합돼 있어 골프에서는 한 나라나 마찬가지다. 이래서 북아일랜드 출신 매킬로이는 국가 대표로 참가할 때는 영국이나 아일랜드 어느 쪽 대표로도 가능하다.

제89회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연장 접전 끝에 우승을 놓친 저스틴 로즈가 하늘을 바라보며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AFP연합)
제89회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연장 접전 끝에 우승을 놓친 저스틴 로즈가 하늘을 바라보며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AFP연합)

예전에 매킬로이는 리우 올림픽(2016년)을 앞두고 아일랜드 국명을 택했다. 당시 바이러스가 우려된다며 출전을 포기했다.

아일랜드는 우리처럼 장구한 세월 지배와 압제의 설움을 지녔다. 조상인 켈트족이 앵글로색슨족에 밀려 아일랜드로 넘어온 이래 800년간 수난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아일랜드는 1921년 영국에서 분리돼 독립됐지만 북아일랜드는 자치령으로 영국의 일원으로 남았다. 북아일랜드 골프 영웅 매킬로이 친척도 개신교 민병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고 한다.

북아일랜드에선 주로 본토에서 건너온 개신교도와 원래 주류인 카톨릭교도 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종교 분쟁에다 치열한 무장 투쟁까지 더해졌지만 결국 북아일랜드는 독립하지 못했다.

골프의 본산 스코틀랜드도 잉글랜드 침략으로 오랜 세월을 투쟁으로 보내야 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에 스코틀랜드 전쟁 영웅 윌리엄 월레스의 활약이 잘 나와 있다.

스코틀랜드는 1707년 잉글랜드 앤 여왕 때 합병됐다. 웨일스는 앞서 1536년 잉글랜드 헨리 8세때 합쳐졌다.

사진설명

이 과정에서 쌓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한과 정서는 주옥 같은 민요로 승화됐다. 특히 아일랜드는 굴곡진 삶을 살아온 우리 민족 정서와 무척 닮았다.

민요 ‘대니 보이(Danny Boy)’가 대표적이다. ‘아 목동아’로 우리에게 알려졌는데 전쟁터에 아들을 보내는 노모의 애달픈 심정을 담았다.

미국의 요절 가수 에바 캐시디의 우수에 젖은 허스키 톤과 나나 무스쿠리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영혼을 적신다. 색소폰 실 오스틴과 기타 에릭 클랩턴 버전이 압권이다.

아일랜드 민요로 ‘샐리 가든’도 있다. 아일랜드 국민 시인 예이츠의 시를 노래로 옮겼는데 원제목은 ‘버드나무 정원 아래서(Down by salley garden)’이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올드 랭 자인(Auld Lang Syne)’은 스코틀랜드 정서를 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요로 꼽힌다. 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가 지은 이 노래는 비비앤 리와 로버트 테일러 주연 ‘애수’의 주제곡으로 유명하다. 원제목은 워털루 브릿지(Waterloo Bridge)이다.

스코틀랜드 민요 ‘애니 로리(Annie Laurie)’도 불후의 명곡이다. 1825년 존 스콧이 만든 이 곡은 자기를 사랑하고도 다른 남자와 결혼한 아름다운 소녀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사진설명

크림전쟁에 출전한 스코틀랜드 출신 병사들이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을 생각하며 부르다가 전 세계에 퍼졌다고 한다. 미국 영화배우이자 가수인 실라 라이언(Sheila Ryan)의 목소리가 주옥 같다.

학창시절 애창곡이었던 ‘등대지기’의 고장도 영국이다. 가수 은희에 이어 여성 로커 서문탁이 방송 ‘불후의 명곡’에서 부른 편곡이 절창이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이번 마스터스는 영국에서 열리는 디 오픈(The Open)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경기를 끝내고 두 선수가 포옹하면서 다가서기 어려웠던 두 나라에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음악으로 위로받던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가 모처럼 서로에게 한 발 다가서는 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마스터스가 서로에게 힘겨웠던 지난 시기를 끝내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이봐, 네가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걸 지켜보기 위해 이 그린에 서게 돼 정말 기뻤어.”

이날 버디를 10개나 잡고도 패한 로즈는 경기 직후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매킬로이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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