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5월 18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블레이도르프 동물원에서 고릴라 탈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고릴라는 수컷으로 이름은 보키토(Bokito)입니다. 베를린 동물원에서 태어난 보키토는 탈출 당시 나이가 11세였습니다. 보키토는 3.5m 해자를 뛰어넘고, 7000볼트 전기 울타리를 통과해 탈출했습니다. 보키토는 동물원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테이블과 의자를 던지고 난동을 부려 여러 관람객들에게 부상을 입혔지요.
흥미롭게도 보키토는 한 여성을 목표로 그렇게 날뛰었다고 합니다. 그 여성은 사건 이전부터 보키토를 특별히 좋아했던 동물원 단골 고객이었습니다. 그녀는 주 4회 이상 동물원을 찾아 유리창 너머로 보키토와 눈을 맞추거나 미소로 교감을 나누려 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웃으면 보키토도 웃는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녀는 고릴라와 자신이 정서적으로 소통한다고 확신했지만, 그건 그저 그녀의 생각이었습니다. 동물원 관리인들은 그녀에게 고릴라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했습니다.
탈출한 보키토는 그녀를 붙잡아 수십 미터를 끌고 다니며 팔과 손에 큰 부상을 입혔습니다. 보키토는 그녀의 뼈를 부러뜨리고, 100군데 이상을 물어뜯었습니다. 결국 동물원 관리인들은 마취총을 쏴 보키토를 제압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야생동물과의 눈맞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그 결과 야생동물과의 눈맞춤은 아주 심각한 위협 신호라는 것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보키토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 한 보험회사는 ‘보키토카이커(Bokito Kijker)’라는 안경을 개발했습니다. ‘보키토 관찰 안경’이라는 뜻입니다. 종이 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보키토카이커에는 왼쪽 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작은 구멍을 통해 관람객이 고릴라를 볼 수 있지만, 고릴라 입장에서는 인간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여기게 합니다. 눈맞춤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고릴라와의 불상사를 피하게 하는 기막힌 발명품이지요. 이 안경을 만든 보험회사는 2008년 창조 관련 페스티벌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지요.
이 사건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보키토브루프(Bokitoproof)’라는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보키토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2007년도 네덜란드에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었고, 사회적 안전과 내구성을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동물원 우리로 다시 돌아온 보키토는 2023년 4월, 10명의 자식을 두고 27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릴라는 40년 이상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상당히 일찍 사망한 셈이지요.

‘강한 것’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습니다!
고릴라와 같은 야생동물과 달리, 개는 인간과 눈맞춤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습니다. 눈 주변 근육 구조까지 변했지요. 눈을 더 크고 어려 보이게 해서 인간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게 된 겁니다.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고 인간과 눈을 맞출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을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로 정의합니다. ‘자기 가축화’란 인간의 의도적인 선택이나 개입 없이 야생동물이 자연스럽게 가축화되는 진화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훈련시키지 않아도 공격성이 감소하고 소통 능력이 증가하여 인간과의 상호작용 능력이 향상한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늑대를 훈련시켜 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늑대들 중 순하고 착한 종이 스스로 인간 주변에 머물면서 개로 진화했다는 주장입니다. 시작은 인간 배설물을 쉽게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아지가 ‘똥’을 먹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에 기록된 습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년)의 진화론이 나올 즈음 논의된 바 있던 이 자기 가축화 개념이 20세기 이후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구소련의 드미트리 벨랴예프(Dmitri Belyaev, 1917~1985년)가 1959년에 시작한 은여우 가축화 실험 때문입니다. 벨랴예프와 그의 연구팀은 수십 년 동안 은색 여우를 번식시키며, 개처럼 인간 친화적인 여우를 길러냈습니다. 귀가 늘어지고, 꼬리가 말려 올라갔으며, 얼룩무늬 예쁜 털을 가진 개체가 태어났고, 주둥이는 짧고 둥글게 변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인간과 눈을 맞추고, 손짓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랴예프는 ‘자기 가축화’를 ‘동물이 인간과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있고,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복종하고, 인간이 만든 조건에서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자신은 수십 년 동안 은색 여우를 번식시켜 이처럼 ‘착한(!)’ 종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본래 진화 과정을 유추해보면 늑대나 여우가 ‘눈맞춤’과 같은 소통 능력을 스스로 발전시켜 생존할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자기(self)’ 가축화입니다. 우리 집 강아지 호두가 아내 마음을 한눈에 사로잡은 것은 유전자에 기록된 자기 가축화의 행동 때문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 호두의 귀여운 외모와 눈맞춤 같은 친화력과 관련해 미국 듀크대 진화인류학과 교수 브라이언 헤어(Brian Hare, 1976년~)는 2020년 출간한 책을 통해 아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고 주장합니다. 다윈이 이야기하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니라 진화의 최종 승자는 ‘다정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친화력의 핵심은 ‘눈맞춤’입니다.


‘눈의 흰자’ 덕분에 인간은 지구를 정복했습니다!
일부 동물도 눈맞춤을 하지만, 인간의 눈맞춤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눈의 흰자위, 즉 ‘공막(鞏膜·sclera)’ 때문입니다. 유난히 크고 흰 공막(white sclera)은 인간의 눈을 특징 짓는 가장 중요한 부위입니다. 대부분 동물은 공막을 숨기기 때문에 눈동자와 구별이 어렵습니다. 시선 방향을 다른 동물이 예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흰 공막으로 시선 방향을 분명하게 노출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만, 인간에게는 복잡한 사회적 소통을 발달시키고 지구 정복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눈을 비교하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야생에서 상위 포식자, 즉 육식동물의 눈은 작고, 머리 앞쪽으로 몰려 있습니다. 눈과 눈 사이 거리, 즉 ‘안간 거리(Intercanthal distance)’가 아주 짧습니다. 양쪽 눈 시야가 중첩되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사냥감을 목표로 삼고 거리를 판단하는 데 매우 유리합니다. 그러나 토끼, 노루, 사슴 등 초식동물의 눈은 머리 양옆에 위치합니다. 포식자 접근을 감지하고 회피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 겁니다. 초식동물은 ‘주변시(周邊視·Peripheral Vision)’를 중시하는 방어적 시각을 가졌고, 육식동물은 ‘중앙시(中央視·Central Vision)’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지요. 그러나 초
식동물이나 육식동물 모두 자신의 시선 방향을 숨깁니다.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인간의 눈은 다릅니다. 야생에서 생존하기에 아주 불리한 매우 큰 흰자를 가졌습니다.
실제로 88종의 영장류를 비교한 연구에서 인간만이 노출된 흰 공막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일본 교토대 후미히로 카노(Fumihiro Kano) 교수 연구팀은 인간 눈의 구조가 다른 유인원들과 비교하여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 눈의 흰 공막은 크게 노출되어 있어 눈의 윤곽과 홍채를 명확히 드러내며 시선 방향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흰 공막은 어두울 때나 먼 거리에서도 시선의 방향을 타인에게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흰 공막의 이런 특징은 타인과의 ‘공동주의(joint attention)’를 가능케 하여 다른 유인원에게서는 볼 수 없는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케 합니다. 이를 ‘시선 신호 가설(Gaze-Signaling Hypothesis)’이라 합니다. 상대방 생각과 의도를 읽고, 공유하는 차원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지요. 동물과 비슷한 진화의 과정을 겪던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은 바로 크고 흰 공막 덕분입니다.
미키마우스와 아톰의 ‘눈동자’가 특별한 이유
눈의 흰 공막이 단지 협업의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의 흰 공막은 인간의 건강과 젊음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시각적 단서가 됩니다. 이에 대한 실험도 존재합니다. 눈의 공막 사진을 디지털 편집으로 합성해 ‘붉은 공막’ ‘노란 공막’ ‘과도하게 밝은 흰 공막’을 만들고 피실험자들에게 일반적인 ‘흰 공막’과 비교 평가하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붉은 공막’은 슬픔과 건강 악화의 신호로, ‘노란 공막’은 노화와 질병 신호로 간주되었습니다. ‘과도하게 밝은 흰 공막’은 더 젊게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건강이나 매력도에서 보통의 흰 공막과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맑고 흰 눈이 매력적인 외모의 조건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생식 적합성’과 관련한 중요한 사회적 신호로 작용합니다. 건강하고 젊게 보여 배우자 선택에 유리하다는 뜻이지요. 좋은 인상을 주는 흰 공막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눈과 유사한 큰 눈을 가진 로봇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MIT에서 만든 ‘키스멧(Kismet)’이라는 로봇입니다.
2007년 테런스 버넘(Terence C. Burnham)과 브라이언 헤어(Brian Hare)가 공동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흰 공막이 특징인 로봇 키스멧이 지켜보는 가운데 게임을 한 그룹의 기부 행위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30% 이상 높았다고 합니다. 이를 저자들은 ‘키스멧 효과(Kismet Effect)’라고 정의했습니다. 기존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와 같은 내용입니다. 누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진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키스멧 효과는 인간이 아닌 로봇 눈에 그려진 흰 공막의 존재만으로도 사람들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미키마우스의 눈입니다. 미키마우스가 사랑받게 된 것도 눈에 흰자를 그려 넣으면서부터라는 주장입니다. 미키마우스 캐릭터를 처음 만든 사람은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년)와 어브 아이웍스(Ub Iwerks, 1901~1971년)입니다. 1928년 단편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에서 처음 선보였습니다. 이때 미키마우스의 눈은 까만 콩 같았습니다.
1939년, 디즈니사 애니메이터였던 프레드 무어(Fred Moore, 1911~1952년)는 장편 만화영화 ‘판타지아(Fantasia)’의 ‘마법사의 제자(The Sorcerer’s Apprentice)’라는 파트를 제작하며 미키마우스의 외모를 업데이트합니다. 미키마우스 눈에 동공과 흰 공막을 추가했지요.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이후 미키마우스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그 모습은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됩니다.
미키마우스의 큰 눈과 흰 공막은 일본 애니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만화의 신’으로 불리는 오사무 테즈카는 미키마우스와 아주 비슷한 눈을 가진 ‘철완 아톰’을 창조했습니다. 미키마우스보다 더 크고 과장된 아톰의 눈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을 특징 짓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됩니다. 바로 ‘삼백안(三白眼·Sanpaku Eyes)’입니다. 정의하자면 눈동자가 위쪽으로 치우쳐 양옆과 아래쪽, 세 방향에서 흰 공막이 크게 노출된 눈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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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6호 (2025.04.23~2025.04.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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