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란 보고서'는 모든 문제가 지속적으로 비싼 달러화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미국 제조업 수출 경쟁력이 추락하면서 공장이 문을 닫고, 더 이상 가정을 부양할 수 없게 된 중산층들이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거나 마약에 빠지면서 지역경제가 황폐화됐다고 주장한다. 미국 중부 러스트벨트 얘기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많이 풀수록 다른 나라는 국제 거래가 원활해지는 이득을 누리지만, 미국은 그럴수록 쌍둥이 적자(재정적자·무역적자)라는 고통을 겪는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트리핀의 딜레마'다. 특히 중국이 가장 많은 수혜를 누리고 있다.
미란은 미국 제조업 공동화를 국가 안보의 위기로 봤다. "철강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는 트럼프 주장처럼 무기를 생산할 수 없으면 국가 안보도 없다는 주장이다. 보고서는 미국과 동맹이라고 떠들면서 중국과 더 많이 교역을 하고 투자하는 우방국들을 신뢰할 수 있냐고 묻는다. 최악의 경우에도 그들이 아군으로 남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냐고 거듭 묻는다.
보고서는 관세를 반중국 전선을 위한 협상 지렛대로 표현한다. 달러라는 기축통화와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우산 속에서 혜택을 받으려면 그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논리다. 분담을 적게 할수록 더 무거운 관세 고통은 불가피해진다.
중국이 관세효과를 상쇄하려고 위안화 약세(달러화 강세)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관세 다음은 환율 정책을 꼽았다. 그 순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관세전쟁으로 달러화가 처음에는 강세를 보이겠지만 점차 약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다만 인플레이션이 변수다. 연준이 금리인상에 나서지 않게 하려면 물가를 잡아야 한다. 미란은 수요보다는 공급 측면의 정책을 제시한다. 적극적인 규제완화와 에너지가격(유가) 인하로 인플레이션을 누르겠다는 계산이다. 정부효율부 수장인 일론 머스크가 최근 전기톱을 들고 관료주의 혁파를 외친 퍼포먼스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보고서를 읽을수록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시 이뤄진 '플라자 합의'가 자꾸 연상됐다. 미란도 '마러라고 합의' 같은 다자 간 협의가 필요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공교롭게도 레이건 대통령의 수석경제학자였던 마틴 펠드스타인은 미란의 하버드대 박사과정 스승이다.
40년 전에도 미국은 트리핀 딜레마로 쌍둥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었다. 결국 일본 엔화값을 크게 올려 달러화 가치를 낮추기로 합의했다. 2년 만에 달러화는 30% 이상 급락했다. 표적이 됐던 일본은 그 뒤로 잃어버린 40년을 겪고 있고, 외환사정이 나빴던 중남미와 동유럽을 강타하며 소비에트연방 붕괴의 단초가 됐다.
사실 트럼프의 관세·통화정책이 옳은 정책인지, 이로써 미국 경제가 더 좋아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격변기를 맞은 한국 앞에 어떤 소용돌이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40년 전에는 한국이 가장 많은 혜택을 봤지만, 당시 붕괴했던 일본의 길, 아니 중남미 또는 동유럽의 길로 들어갈지 알 수 없어서다.
[송성훈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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