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고급인력취업비자 발급 2017년 이후 7년만에 최대 中 0.96명·日 0.66명 나갈때 한국은 11.3명 미국으로 떠나 AI시대 '두뇌 유출' 심화 우려 정부, 인재유치 노력하지만 석달간 고작 21명 실적에 그쳐
국내 정보기술(IT) 기업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A씨(38)는 전문 변호사와 미국 취업 이민비자(EB2)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경력 정도면 국내에서 받는 연봉의 2.5배를 주는 미국 기업을 찾을 수 있다는 말에 고민이 시작됐다. 자녀까지 미국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점도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세계 주요국이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전략 기술과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인재 유치에 속도를 내면서 A씨와 같이 고급 인력 취업 이민비자(EB1·EB2)를 받아 미국행을 선택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의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두뇌 유출)' 현상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15일 김종민 무소속 의원이 미국 국무부 통계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EB1·EB2 비자를 발급받은 한국인은 5847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2017년 6100명 이후 7년 만에 최대 규모다.
EB1·EB2는 반도체 엔지니어, 의료인 등 주로 과학기술 부문 고학력·고숙련 인재에게 가족까지 포함해 영주권을 가질 기회를 주는 비자다. 2021년에는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EB1·EB2 비자 발급 인원이 3318명까지 줄었으나 이후 3년간 연간 5000명 이상의 고급 인력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유독 고급 인력 유출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인구 10만명당 비자 발급 인원을 분석한 결과 한국은 11.3명으로 집계됐다. 일본은 0.66명에 불과했고, 중국과 인도는 각각 0.96명, 0.88명이었다. 상대적으로 인력 유출 규모가 큰 대만(6.41명)·싱가포르(3.33명)도 한국보다는 현저히 낮았다.
전문가들은 핵심 인재에 대한 낮은 보상 구조, 국가 차원의 인재를 관리할 컨트롤타워 부재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주영섭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는 "AI 시대 개막과 함께 1명의 핵심 인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을 글로벌 각국과 기업들이 실감하는 상황"이라며 "경직된 노동 시장과 연공서열 중심의 해묵은 보수 체계, AI 등 패권 경쟁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낮은 위상 등은 핵심 인재의 이탈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고 지목했다.
정부는 해외 인재를 유치해 국내 인재 유출을 상쇄하겠다는 전략이다. 지난해 국무총리 주재 제3차 인재양성전략회의를 통해 'K-테크 패스'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해외 인재들에게 입국·체류에서 최상의 혜택과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최대 10년간 근로소득세를 50% 감면하고, 자녀의 외국인학교 정원 외 입학을 허용했다. 아울러 현행 2억원인 전세대출 및 보증 한도를 내국인 수준인 5억원까지 확대했다. 정부는 세계 100위 이내 상위권 대학 석사 이상 고급 인재의 국내 정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국내 취업이 확정되지 않아도 구직비자(D-10)로 2년간 자유롭게 취업 탐색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정부가 해외 인재 유치 프로젝트로 2030년까지 1000명의 해외 인재를 유치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올해 4월 2일 첫발을 내디딘 후 6월 말까지 석 달간 비자 발급 건수는 21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지난 13일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는 청년 과학기술인 지원과 석학 및 신진급 해외 인재 2000명 유치 계획을 밝혔다.
산업계에서는 해외 인재 유치 프로젝트가 성과를 내려면 좀 더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김덕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팀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비자 혜택과 세제 감면, 교육·인프라스트럭처 구축 등을 통해 한 도시 내에서 장기 체류할 수 있도록 하는 '외국인 정주형 특화도시 조성'과 해외 인재 유입이 산업 고도화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기업의 투자 계획과 인재 유치 전략을 연계한 통합 유치 플랫폼 구축 등을 제안했다.
김 의원은 "대학 교육 시스템, 인재 확보 정책, 이공계 보상 체계 개선, 도전적 연구개발(R&D) 체계 확립 등 복합적인 개선책이 필요하다"며 "인재 확보 기관인 'K-인재확보본부'를 신설하고, 첨단 산업 인재 육성과 유치·정착을 원스톱으로 지원하는 국가 차원의 인재 확보 총력전을 펼쳐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