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1 13:38:42
2차세계대전 폭격 대상 ‘베어링’ 가치 80년 흘러 여전히 세계 제조업 ‘핵심’ 10년 전 볼펜 촉 제대로 못 만들던 中 굴러가는 모든 제품서 ‘공급망 지배력’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중국이 세계 1위 제조업 국가가 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미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한 지 오래인데 이례적으로 자기 입을 통해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중국은 세계 제조업을 움직이는 중추 국가임을 뜻하는 그의 발언과 더불어 이 깜짝 선언한 장소가 눈길을 끕니다. 허난성에서 소위 쇠구슬(볼 베어링)을 만드는 업체입니다.
그저 다를 것 없는 중국 주석의 지방 시찰 사진 같지만 그 밑을 흐르는 경제적 맥락이 흥미롭습니다.
시 주석의 행보를 설명하기에 앞서 맬컴 글래드웰의 2021년 저서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는 ‘폭격기 마피아’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왜 미국이 2차세계대전 당시 정밀 폭격 기술에 사활을 걸었는지를 조명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 공군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국의 전쟁 역량을 꺾기 위한 전략으로 핵심 공습 타깃을 정하고 관련 정밀 폭격 기술에 투자했다고 평가합니다.
주목할 점은 미 공군이 맞춤형 타깃으로 정한 지점 중 하나가 독일의 ‘볼 베어링’ 생산 공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베어링 공장을 제대로 망가뜨리면 군용 차량과 탱크부터 전투기에 이르는 독일 무기 시스템 생산에서 심각한 ‘병목’을 일으켜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볼 베어링은 모든 기계 장치의 핵심이다. 작은 금속 공이 그리스로 덮여 있고 강철 링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전거의 차축 내부에는 바퀴가 자유롭게 회전하도록 미니 강철 롤러 역할을 하는 12개의 볼 베어링이 있다. 2~3달러 상당의 1/4인치 직경 볼 베어링이 없으면 자전거는 작동하지 않는다. 자동차의 엔진도 마찬가지다. 회전하는 부품이 있는 거의 모든 기계적인 물체도 그렇다. (중략) 연합군은 볼 베어링 생산을 중단시키기 위해 독일 산업 중심지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시도했다. (독일 슈바인푸르트 볼 베어링 공장을) 폭격하면 독일 전쟁 경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찾고 있던 목표였고, 볼 베어링이 그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카드로 쌓아 올린 집에서 한 장을 빼면 전체가 무너지고 복잡한 거미줄로 짜여진 실 매듭에서 하나를 당기면 전체가 풀리는 것과 같다.”
연합군은 1942년 말부터 지속적으로 독일 남부 슈바인푸르트 지역 볼 베어링 공장을 타깃으로 폭격에 나섰습니다.
당시 미 공군은 네덜란드 출신 과학자 칼 노든이 개발한 ‘노든 폭격조준기’를 기반으로 슈바인푸르트 볼 베어링 공장에 융단 폭격을 가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볼 베어링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록히드마틴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피터 배럿 브라이언의 글로 이어집니다.
그는 지난 2022년 미국 인기 IT 블로그인 미디엄(Medium)에 올린 글에서 볼 베어링의 글로벌 산업 가치와 기술적 어려움을 중국 사례로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한 중국은 지난 2015년까지도 볼펜에 들어가는 작은 펜촉(역시 볼 베어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당시 리커창 총리가 국영 TV에 나와 한탄했죠.
전 세계 볼펜의 80%를 공급하는 중국이 펜촉인 작은 볼 베어링을 못 만들어 독일과 일본, 스위스에서 전량 수입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구 14억명과 국내총생산(GDP) 12조달러의 경제를 거느리며 핵무기 350개를 보유하며 우주선과 첨단 스텔스 전투기, 항공모함을 만들어내는 나라답지 않다는 질타였습니다.
브라이언 엔지니어는 이 작은 해프닝이 역설적으로 볼 베어링의 산업 가치를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볼펜부터 첨단 산업과 전쟁 드론, 재블린 미사일 등 온갖 정교한 기술의 전쟁 무기에 핵심 부품으로 들어가는 볼 베어링이 방대한 수요에 비해 결코 고품질 제조가 쉽지 않다는 것이죠.
이 때문에 언제나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한 전략 자원이라고 말합니다.
관련해서 2017년 1월 17일 미 워싱턴포스트는 ‘마침내 중국이 볼펜을 독자 생산한다(Finally, China manufactures a ballpoint pen all by itself)’는 기사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2015년 리커창 총리가 베이징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중국산 볼펜을 사용할 때 글씨가 거칠다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리 총리에게 완벽한 볼펜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 경제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략) 그의 발언은 행동을 촉발했고 이번 주 중국 국경기업 타이위안철강그룹(TISCO)이 5년간의 연구 개발 끝에 2년 안에 볼펜 팁 대량 생산을 시작하고 수입을 대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국산 볼펜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 혁신의 상징이다.”
볼펜촉 하나를 가지고 ‘혁신의 상징’이라고 쓴 워싱턴포스트 기사가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닙니다.
앞선 브라이언 엔지니어의 설명처럼 크건 작건 뛰어난 내구성과 오차 없는 완벽한 원형의 베어링을 만드는 건 3D 금속 프린팅 기술 시대가 열린 지금도 여전히 난제의 영역입니다.
한국 기업들도 고속열차에 들어가는 차축 베어링부터 전기차에 쓰이는 베어링 볼 제조기술까지 국산·상용화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볼 베어링의 쓰임새와 기술 요구 수준은 계속 확대되는데 이 수요와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제조 역량을 갖춘 나라는 일본과 독일, 미국, 중국 정도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19일 “중국이 세계 제조업 1위 국가로 발돋움했다”고 발언한 곳은 이처럼 중국 최대 베어링 기업으로 성장한 허난성의 뤄양베어링그룹이었습니다.
1954년 설립된 이 업체는 항공우주 엔진부터 철도 운송 차량과 중장비 등 1만개 이상 맞춤형 베어링을 생산하며 중국 제조업의 ‘관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 산업의 관절은 곧 세계 산업의 관절을 뜻합니다. 볼 베어링의 역사와 산업적 맥락을 보면 시 주석이 왜 굳이 지방까지 내려가 세계 1위 제조업 국가가 됐다고 선포했는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첨단 과학기술 관련 미국 최고 싱크탱크로 꼽히는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로버트 앳킨슨 회장은 얼마전 중국의 혁신 한계점으로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 문제를 지적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중국이 진정한 혁신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중국 기업들이 압연 부품과 같은 공작 기계의 고급 핵심 부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롤링 부품, 볼 스크류와 롤러 선형 가이드 레일을 포함한 롤링 부품은 공작 기계의 효율을 높이고 정확도를 높이며 에너지 손실을 줄인다. 이러한 핵심 부품의 90% 이상이 수입산이다. 공작 기계의 또 다른 핵심 부품인 고급 정밀 베어링 생산은 일본, 독일, 스웨덴, 그리고 미국이 주로 생산한다.”
최근 중국 행보를 보면 그의 평가는 절반은 맞고 나머지 절반은 틀린 것으로 보입니다.
볼펜에 들어가는 작은 베어링 하나도 2017년에 이르러서야 기술 독립에 성공했지만 중국의 강점은 혀를 내두르는 혁신의 속도입니다.
모건스탠리는 지난 2월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 분석에서 로봇 바디 관련 핵심 베어링 기업으로 5곳을 지목했는데 셰플러(독일), 팀켄·RBC베어링(미국), NSK(일본)과 함께 중국 기업 쌍림(Shuanglin)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앳킨슨 회장이 지적한 롤 스크류와 롤링 부품에서 한계를 지적했는데 이미 액추에이터 부품의 핵심 공급자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중국 제조업에서 볼 베어링은 과거 ‘아픈 손가락’에서 빠르게 세계 공급망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자부심’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독일의 대표 볼 베어링 기업인 셰플러는 지난해 말 유럽에서 4700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회사의 최대 고객이 폭스바겐입니다.
중국 자동차 업체들의 약진에 폭스바겐이 흔들리면서 독일 소부장 산업이 함께 위협받는 상황입니다.
2010년 중국 지리자동차가 인수한 스웨덴 볼보 역시 1927년 볼 베어링 회사에서 출발했습니다. 볼보(Volvo)는 라틴어 ‘volvere’(구르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굴러 움직이는 많은 것들의 공급망이 이렇듯 중국의 그림자 속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세상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볼 베어링 분야에서 분투하는 우리 혁신 중소기업들에 많은 응원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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