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3.11.26 12:04:50
[韓당구심판 英무대 서다②] 존경받는 심판 ‘척척박사’ 80대 수석심판과 룸메이트는 큰 행운 150분간 휴식없이 경기, 선수 심판 집중력 대단 “신기하네” 내가 심판 본 경기에 관중들 몰려
[편집자주] 영국은 당구 종목인 스누커와 잉글리시빌리어드의 종주국이다. 프로 스누커인 월드스누커투어(WST)는 상금과 권위 등에서 세계 최고 당구무대로 평가받는다. 잉글리시빌리어드는 흔히 4구와 포켓볼성격이 혼합된 당구 종목으로 영국을 중심으로 활발하다.
캐롬(1, 3쿠션)이 인기인 한국에선 스누커와 잉글리시빌리어드가 비인기 종목이다. 동호인도 찾아보기 힘들고 선수도 30여 명 안팎이다. 하지만 전국체전과 아시안게임(2030년) 정식종목일 정도로 전략 종목으로서 중요하다.
대한당구연맹 이길남 심판은 국내의 몇 안되는 스누커와 잉글리시빌리어드 전문가다. 또한 당구칼럼니스트로 MK빌리어드뉴스에 스누커관련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그는 당구연맹 대회 심판직을 수행하면서 스누커와 잉글리시빌리어드 본고장인 영국에 규정해석 등에 관해 수차례 질의를 했다. 이런 인연으로 세계프로당구스누커협회(WPBSA) 초청을 받아 10월11일부터 21일까지 영국 당구를 체험하고 ‘월드빌리어드챔피언십’ 등 큰 대회 심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덕에 한국심판과 선수들이 영국무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됐다. 한국 당구심판으로서 최초로 ‘월드빌리어드챔피언십’무대에 서기도 한 그의 영국 당구 체험기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번이 두 번째다.
런던에서 이틀간 체류한 후 대회가 열리는 버밍엄으로 넘어갔다. 런던과 맨체스터 사이에 있는 버밍엄은 영국 제3의 도시로 꽤 큰 편이다. 날씨는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했으나,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전형적인 영국 날씨였다.
숙소는 월셜프리미어(Walshall premier)호텔이었고, 대회장인 버밍엄 북쪽의 랜디우드(Landywood) 스누커클럽과는 승용차로 20~30분 거리였다. 클럽에는 스누커 테이블 8대와 4대 공간이 있었고, 식음료코너도 있었다. 버밍엄에서 지내는 동안 호텔 룸메이트는 80대 수석 심판(Head Referee) 브랜든 데블린이었다. 그는 심판 경력이 37년이나 되는 원로였다.
주최측의 배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역시 행운이었다. 빈틈없어 보이는 노신사는 각종 규정에 대해 해박했다. 물어보면 모르는게 없을 정도로 척척박사였다. 때문에 6박7일 동안 지내면서 스누커와 잉글리시빌리어드 규정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심판 수행에 필요한 여러 궁금증도 해소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와 함께 지내며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한국의 당구심판은 대개 30~40대가 많다. 50대는 물론이고, 60대는 더더욱 드물다. 영국에선 머리 희끗희끗한 60대 이상 심판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심판으로서 자부심도 강했고, 선수와 주최측에게서 존경받는 분위기였다.
16~19일(현지시간) 열린 월드빌리어드챔피언십(World Billiards Championship)은 점수제가 아니라 시간 경기(time format)로 진행됐다. 참가선수 50명이 5명씩 10개 조로 나누어 치른 예선 리그는 90분 경기였다. 이후 위로 올라갈수록 경기시간이 늘었다. 24강전은 120분. 16강전은 150분인데 모두 중간 휴식 없이 진행됐다. 쉬는 시간없이 두 시간 넘게 경기해도 선수와 심판들은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8강전은 180분, 4강전은 240분으로 중간에 30분 휴식이 있다. 결승전은 무려 300분 동안 하며 중간에 1시간 휴식이 있다.
잉글리시빌리어드 규정에는 중간 휴식 시간에 남겨진 공 위치를 표시하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실제 적용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필자가 심판을 본 경기는 예선전과 본선 16강전, 8강전이었다. 당연히 한국심판으로는 처음이다. 마음 같아서는 더 중요한 경기 심판도 맡아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나보다 훨씬 경륜있는 분들이 4강, 결승전 심판을 봤다.
대회 심판진은 영국, 아일랜드,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 심판으로 구성됐다. 다른 나라에서 온 심판들은 자국 심판끼리 서로 돕고 협업했다. 한국 심판은 달랑 필자 혼자여서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대회 기간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유독 내가 심판 보는 경기에 많은 관중이 몰렸다. 다른 테이블 선수와 비슷한 수준의 선수가 경기하는데도 말이다. 아마 그들은 한국 심판이 어떻게 경기를 잘 진행하는지 궁금했던 모앙이다. 잉글리시빌리어드를 치는지조차 모르는 나라에서 온 심판이라 더욱 신기하기도 했을 터다. 가령 강원도 양구 국토정중앙배 전국당구대회 3쿠션 경기 심판을 미국이나 유럽 사람이 맡는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회 마지막날 시상식장에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우승자인 싱가포르의 피터 길크리스트 선수는 우승 소감을 밝히면서 심판진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Mr. Lee, You’re a good referee“라고 하면서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우승자가 심판을 추켜세우며 악수까지 청하다니. 배려에 감동받았다. “이곳에선 심판이 제대로 존경받는구나.” [이길남 대한당구연맹 심판(경영학 박사)/당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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